하나님의 영광 (Gloria Dei)
1. 시작하는 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모든 성도의 마음에, 몽골 땅 위에 비춰지기를 소망하며…(고후4:6).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의 개혁과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영광의 하나님”에 대한 각별한 인식과 깨달음이 있었다. 교회와 성도가 “영광의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쁨을 맛보며, 또 이를 증거하는 일에 온 마음과 힘을 기울일 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삶과 영혼을 풍성케 하셨고 또한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에 빛과 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가 육체의 정욕과 세속적인 욕망에 빠져 “영광의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때, 하나님의 영광 대신 “성장과 교권”을 통하여 자기 영광을 추구할 때, 교회는 타락과 부패의 선봉이 되었고 세상에 재앙거리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교회와 성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인이 되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여 세상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영광의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고, 그의 영광을 맛보고 즐거워하며, 그의 아름다우신 덕을 선전하고, 그 영광의 하나님을 자랑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 재앙거리와 비웃음거리가 될 것인가? 우리는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기를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영광의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집중해야만 한다.
2.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경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고전10:31).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성도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즉,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의 삶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그 원동력은 “하나님의 영광”임을 천명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주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매우 실제적인 주제임을 보여준다.
고린도 교회는 믿음에 열심이 있었지만 많은 문제들로 혼란한 가운데 있었다. 말하자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뉘어 한 공동체를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성적인 타락과 음행의 문제, 성도 간에 이권을 놓고 세상법정에 고발하는 문제, 결혼에 관한 문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 성도들이 우상을 섬기며 귀신에게 제사하는 문제,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문제, 성찬의 문제, 성령의 은사 문제 등으로 성도가 서로에게 대하여 그리고 사회에 대하여 덕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바울은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으며(고전10:23-24),
계속해서 그는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고전10:31).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에 관심을 가질 때는 분쟁과 다툼만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질 때는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란 주제는 특별히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매우 실제적인 해답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실제적인 해답이 되어야만 한다.
교회와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모든 사역의 시작과 마지막뿐만 아니라 문제해결의 시작과 마지막도 그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이어야만 한다.
3. 구약성경에서의 영광[1]
1) “영광”(카보드)의 기본적인 문자적 의미
구약에서 “영광”이란 의미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말은 “카보드”(kabod, dwbk)라는 명사이며, “영광스럽다”라는 형용사형은 “카베드”(kabed, dbk)이다. “카보드”는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무거움”이나 “무거운 것” 혹은 “많은 양”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보드는 무거운 것, 부(wealth)나 많은 재산, 풍부함, 부자, 또는 군중이나 많은 군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엘리가…나이가 많고 비대한[카베드,kabed, dbk] 까닭이라”(삼상4:18)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카베드,kabed, dbk] 연말마다 깍았으며”(삼하14:26).
“…이 모든 재물을[카보드,kabod, dwbk] 모았다 하는지라”(창31:1).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카보드,kabod, dwbk 재물이나 명예를 뜻함]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시49:17)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카보드,kabod, dwbk 군대를 뜻함]”(사8:7).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카보드,kabod, dwbk 풍부함을 뜻함]”(사10:18).
2) 사람에게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의 영광(카보드)
“영광(무거움)”이라는 말은 사람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이럴 경우 그 낱말의 의미에 변화가 생긴다. 즉 비유적인 의미로 “어떤 사람이 영광스럽다(무겁다)”고 말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탁월한 가치나 중요성, 지위, 능력, 그리고 부로 인하여 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영광(무거움)”이 사람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그 사람의 탁월한 지위나, 능력, 가치, 중요성, 부유함 등을 두루 가리키는 낱말로 사용된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사람은 “명예와 존경을 받을 만하다”는 뜻도 가지게 된다.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카보드,kabod, dwbk 탁월한 부와 명예와 지위와 가치 등을 뜻함]”(창45:13)
“자기의 큰 영광과[카보드,kabod, dwbk 탁월한 지위와 명예를 뜻함]”(에5:11).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카보드,kabod, dwbk 탁월한 지위와 중요성과 가치를 뜻함] 아름답게 할지니”(출28:2)
3)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될 때의 영광(카보드)
하나님은 온 만물의 창조주, 통치자, 심판자시다. 그는 역사를 시작하셨고, 주관하고 계시며, 종결하실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의 독보적인 탁월한 가치와 지위, 능력, 중요성은 결코 다른 존재에게 이양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영광”이란 낱말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될 때에는, 우선적으로 독보적인 탁월함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속성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the Holiness of God)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내적 속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들에 의해 더해지거나 감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3:14)로서 “영광의 하나님”(시29:3, 행7:2)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the Holy God)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적인 내적 속성으로서의 영광은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카보드,kabod, dwbk]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출29:43).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카베드,kabad, dbk]”(레10: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카보드,kabod, dwbk]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네 가운데에서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카베드,kabad, dbk] 하셨다 하라 내가 그 가운데에서 심판을 행하여 내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지라” (겔28:22).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카보드,kabod, dwbk]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시113:4).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카보드,kabod, dwbk]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
“…내가 내 영광을[카보드,kabod, dwbk]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43:7).
“나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카보드,kabod, dwbk]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1).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카보드,kabod, dwbk] 그에게 돌릴지어다”(대상16:29).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카보드,kabod, dwbk]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29:2).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영광의 하나님” 이시다. 또한 그는 온 세상을 그의 영광으로 덮으시며, 그의 선하신 뜻에 따라 그의 영광을 그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모든 영광의 근원이시며 분배자시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카보드,kabod, dwbk]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2:8).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카보드,kabod, dwbk] 네게 주노니…” (왕상3:13).
5) “카보드” 외에 “영광”이란 뜻으로 사용된 낱말들
아데렛(trda)-장엄, 오라(hr/a)-빛, 가아와(hWag) -탁월함, 하다르(rdh)-위엄, 호드(dwh)-광채, 이프아(h[Py)-광휘, 예카르(rqy)-가치 있음, 귀함, 티프아라(hraPt)-아름다움, 쉠(mv)-이름, 테힐라(hlht)-찬양, 체비(ybx)-장식, 꾸밈.
이 말들은 영광이라는 단순한 낱말을 보다 다양한 차원에서 풍부하게 설명해 준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가아와, gaawa, hWag) 칼이시로다”(신33:29).
“유다인에게는 영광과[오라, ora, hr/a]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에8:16).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호드, hod, dwh]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하다르, hadar, rdh] 위엄을 주셨고”(단5:18).
“…그의 영광이[테힐라, tehilla, ,hlht]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합3:3).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티프아라, tipara,hraPt]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티프아라, tipara,hraPt]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슥12:7).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예카르, yeqar,rqy] 왕에게 주셨고” (단2:37)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하다르, hadar, rdh] 위엄을 주셨고”(단5:18)
4. 신약성경에서의 영광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의 “카보드(kabod)” 외에도 “영광”이란 의미로 사용된 많은 낱말들을 “독사(doxa, dovxa)”라는 낱말로 번역하였다.
“독사(dovxa)”는 원래 고대 헬라어에서 “생각”이나 “의견”을 의미하는 낱말이었다. 이 낱말이 신약성경에서 “영광”을 의미하는 낱말로 정착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주전 3세기 중반에 프톨레미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lphus285-246 B.C)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있는 그의 유명한 도서관에 비치하기 위하여 히브리어로 된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이 작업에 참여한 학자들의 숫자가 72명이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 헬라어 역본 성경을 셉투아진타(Septuagint, Septuaginta)라 부르게 되었는데, 셉투아진타는 라틴어로 <70>이란 뜻이다. 약기호로는 <LXX>로 표기한다. 그 후로, 율법서 이외의 구약성경책들도 계속해서 번역되어 주전 132년 경에는 모든 구약성경이 완전히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후로 이 성경역본은 구약과 신약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되는데, 기독교인들이 헬라어로 신약성경을 기록하면서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를 이 셉투아진타에 의거하여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그런 이유로 셉투아진타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성경역본이 되었다.[3]
<셉투아진타>가 번역되었을 때부터, “독사(dovxa)”는 주로 구약의 히브리어 “카보드” (kabod,dwbk)가 가지고 있었던 의미들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신약에서 “영광”을 나타내는 대표적이고 일반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또한 구약에서 “영광”이란 의미로 쓰였던 많은 히브리어들이 “독사(dovxa)”라는 낱말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셉투아진타>의 용례에 따라, “독사(dovxa)”가 “영광”을 의미하는 낱말로 그대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독사(dovxa)”는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로서의 존재양식이나, 그의 위대함, 그의 탁월한 능력, 권세, 명예, 명성 등을 의미한다.
“영광”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영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내적인 속성이며, 오직 그의 것이요, 오직 그에게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만일 사람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며 심판을 받는 원인이 된다.
1) 하나님의 본질적인 내적 속성으로서의 영광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1:17).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1).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
2) 예수 그리스도와 영광
구약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던 “영광”(dovxa)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이것은 예수님을 구약의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리므로 성부 하나님의 영광은 곧 성자 예수님의 영광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가 “영광”이라는 낱말 속에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25:31).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벧전1:21).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5: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3)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스스로 영광을 취하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므로 심판을 받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12:43).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12: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롬1:21).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3).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계16:9).
4)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은 세상 모든 영광의 근원이시며 분배자시므로,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4:20).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영광에 참여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1:18).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2:12).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4).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
5.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통로
1) 임재하심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출40:34).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회막을 바라본즉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민16:42).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8:1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대하7:1).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시26: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2)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16:27).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모든 입으로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1:25).
3) 능력과 기적을 행하심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사63:12).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그 사람이(중풍병자)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깨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 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5:25-26).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7:15-16).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눅13: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11:4).
4) 복음의 말씀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살후3:1).
5)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심판하심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출14:18).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출15:6).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시돈아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네 가운데에서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 하셨다 하라….”(겔28:22).
“내가 내 영광을 여러 민족 가운데에 나타내어 모든 민족이 내가 행한 심판과 내가 그 위에 나타낸 권능을 보게 하리니”(겔39:21).
6) 구원과 은혜를 베푸심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3:13).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시21: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79: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시85:9).
7) 풍성함으로 채워주심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사66:11-12).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23).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6. 사람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방법
1) 경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존경함
경배(예배)는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한다. Worship은 “worth”(가치)와 “ship”(지위나 직함을 가진 사람이나 존재)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성어로서, 일차적으로 “가치가 있는 분, 중요한 분, 신적인 존재”란 의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가치가 있는 중요한 분에게 드리는 존경”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경배란 하나님으로서 가치 있고 중요하신 분에게 드리는 존경”이라 말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경배이다.[4]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대상16:29).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29: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시96:8).
2) 감사와 찬양
“여호와를 두려워 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시22:23).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57:7-11).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시66:2).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시138:5).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시148:13).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4:15).
3) 선행과 의의 열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사60:21).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4) 하나님을 자랑하고 선포함
“자랑하다(boast)”라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할랄(halal llh)” 이라 하며 “찬양하다, 영광을 돌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로 “자랑하다”라는 말은 “카우카오마이(kaukhaomai ka¬caomai)”라 하며 “기뻐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뜻이다. 이 말들은 모두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선포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파르(safar rps)”라 하고, 헬라어로는 “아팡겔로(apanggello apaggellw)라 하는데 “사파르”는 “자세하게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며, “아팡겔로”는 “소식을 전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랑한다”거나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선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면서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다.
“그의 영광을 모든 민족 중에, 그의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지어다”(대상16:24).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시96:3).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20:7).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34:2).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105:3).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사45:25).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10:17).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 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3:3).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2:12).
7. 종교개혁 직전의 사회 및 교회의 상황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지적대로, 중세는[5] 기독교의 이상과 가치가 지배하던 이상적인 시대도 아니었지만, “암흑기”(dark Age)도 아니었다. 중세라는 말은 고대와 근대 사이의 중간시대라는 뜻으로, 그 말에는 고대와 근대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고 덜 중요한 시대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중세”를 암흑기로 보는 시각은 르네상스[6]를 추구하던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리고 종교개혁가들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성직자들이 참된 기독교 신앙을 배반한 시기로 중세를 보았으며, 19-20세기의 개신교 교회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교회와 신학 분야에서 아무런 결실도 없었던 시기라 생각하여 “암흑기”라 하였다.[7]
그러나 중세, 특히 14세기 이후의 중세 후기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다양한 영역들에서 많은 변화와 문제들이 생겨났지만, 그 가운데서도 다양한 생명력과 창조성이 꿈틀거리며 그 힘을 분출시킬 통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중세는 교회의 지배를 통하여 서구사회가 정치적, 정신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하나가 된 시대였다.[8] 그러나 중세 후기에는 이러한 교회의 지배를 통한 통일성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 요인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9]
1095에 시작되어 1291년에 막을 내린 “십자군 전쟁”은 교황권이 정치적으로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기독교 세계의 분열이 촉진되고 교황권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설명하자면,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를 보는 서구의 시야가 넓어짐으로써 지적인 각성과 예술 및 학문의 발전을 추구하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운동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원천으로”인문주의 운동은 고대 문헌들의 정확한 원문을 밝혀내려는 “원문비평”이란 학문을 탄생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성경의 원문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어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십자군들은 화폐를 통한 교역을 시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12-13세기에 발전하게 된 화폐경제는 부르조아 계급을 형성시켰다. 이들은 지방의 귀족들과 영주들에 대항하여 국왕을 지원하였으며,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의 지원을 통하여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근대국가들이 발전하며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국가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 생각하게 하였으며, 우주 전체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는 교황의 지위를 더욱 약화시켰다.
이외에도, 십자군 전쟁의 영향은 유럽사회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쳤는데,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 전쟁을 통하여 유럽인들은 동양의 화약, 유리, 안경, 나침반, 종이와 인쇄술, 연금술, 의학을 수입함으로써 유럽인들은 사회를 변혁할 힘과 더 나아가서는 신대륙을 개척할 수 있는 기술들까지 확보하였다. 그리고 회교권과의 문물교류로 상업이 발달하고 자본이 축적되어 자본주의의 토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보자면, 이 전쟁으로 인하여 무슬림에 대한 선교의 문이 닫히고 상호간에 깊은 적대감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1453년 5월 29일 동방기독교회의 중심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술탄 모하메드 2세가 이끄는 무슬림에 의해 정복당함으로써 기독교 세계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1437년에 창궐한 흑사병은 3년 만에 유럽 전체 인구의 1/3을 감소시켰고, 또 상품이 교역되고 소비되는 시장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 흑사병으로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죽었고, 사람들은 항상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전염병과 죽음 그리고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성지순례와 성인들의 유물숭배 그리고 마술이나 미신과 같은 것들을 통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토속적인 미신과 결합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교회는 여러 나라들 사이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교황은 이탈리아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교황청을 1309년부터 1377년까지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프랑스 왕권 밑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당시 대중들은 이 기간을 유대인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70년과 같다고 하여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라 불렀다. 이후 1378년부터 1409에 걸쳐서는 3명의 서로 다른 교황이 선출되어 서로가 교황의 권리를 주장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비롯하여 추기경들 및 사제들과 수도사들의 성직매매와 성적인 타락, 도덕적인 부패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교회가 그 본래의 사명과 기능을 잃어버리고 망망한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세속적인 가치와 풍조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교황들은 자신의 임기 동안에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을 지어서 예술적으로 치장하는 것을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여 이런저런 명목으로 각종 세금을 거두어 들였고, 십일조와 특별헌금 그리고 면죄부 판매 등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정신이 없었다. 바야흐로 종교와 사회 전반에 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8. 하나님의 영광: 교회를 개혁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의 원천
필자는 수많은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특히 루터와 칼빈을 살펴봄으로써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사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독일 서민들의 신앙을 롤란드 베인톤은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들 생각에 숲, 바람, 물에는 요정과 도깨비, 인어, 마귀할멈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폭우와 홍수 그리고 전염병을 가져오고,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또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것들은 모두 악령들의 짓이었다. 루터의 어머니는 이런 잡귀들이 계란이나 우유나 버터를 훔치는 장난도 하는 것으로 믿었고, 루터 또한 이런 신앙에서 결코 벗어나 본 일이 없었다.”[11]
그러나 루터는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깨달은 복음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믿음, 오직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데 있어서 그의 노력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직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불어넣으시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강조하던 중세교회의 신학에 반대하여, 구원과 신학의 중심을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놓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12]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처럼 원래 일차적으로 신학과 관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하나님 중심의 신학”은 그의 신학적인 개혁작업과 더불어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 프로그램으로 변화되었다.[13]
루터가 “95개 논제” 로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에 도전장을 제출했을 때,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보름스 의회” 에 출두하여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명령 받았다. 그러나 그는 1521년 4월 18일, 황제 찰스 5세(Charles V)가 참석한 보름스 의회에서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하였다:[14]
“여기 내가 서있나이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Hie stehe ich. Ich kan nicht anders. Gott helff mir. Amen.)
왓슨은 루터의 표어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였다.[15]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라!”는 그의 저서에서, 루터가 교황제도의 전체 종교를 비판하고 자신의 개혁이념을 추진한 것은 바로 그 교황제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신성을 도적질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되실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라 하였다.[16]
계속해서 왓슨은 이렇게 말한다:
“루터의 생각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해드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질문하면서 이렇게 답한다: “이 문제는 그가 말하는 ‘칭의의 신앙’ 곧 오직 믿음으로! 혹은 오직 은혜로! 라는 구원의 교리 안에 요약될 수 있는데, 이 둘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심판과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끝없는 자비로써 우리를 대하시는 거저 주시는 그의 사랑이다…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마땅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계시된 그의 영광을 인식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다…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하나님 되게 해드리는 유일한 길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 방법대로 취급하시도록 하는 것인데, 루터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하시도록’ 해드리는 것이다.”[17]
우리는 루터의 신학과 신앙에 대한 왓슨의 통찰력에 깊이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혼돈과 갈등 속에서 새로운 생명과 질서를 찾아 꿈틀거리는 한 시대의 힘을 루터가 어떻게 분출시켰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왓슨은 교회와 성도가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곧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결단할 때, 사회와 교회에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한다.
왓슨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공식은 칼빈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루터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신학과 신앙의 원리였다고 주장하였다. 단지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것이라면, 루터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결정지어 주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 지적하였다.[18]
루터는 1535년에 출판된 <갈라디아서 강의 Lectures on Galatians>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만을 내세우고 가르치는 것이며, 또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내 교리는 사람의 의와 지혜를 정죄한다. 내가 이것을 어길 수 없음은, 나는 마땅히 하나님과 사람에게 속하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돌리기 때문이다”[19]
또한 루터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주제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가치라는 사실을 “자유의지”에 대한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이렇게 논증하였다:
“일반적이고 확실한 구별을 하기 위해서 세 가지 빛-자연의 빛(the light of nature), 은총의 빛(the light of grace), 영광의 빛(the light of glory)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자연의 빛으로는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악한 사람이 번영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은총의 빛으로 해결된다. 은총의 빛으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으로는 죄 짓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자연의 빛과 은총의 빛은 그것은 그 불행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부당한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적(merits)과 관계없이 불경스러운 사람에게 마음대로 왕관을 씌워주시는 반면에, 덜 불경스럽거나 적어도 더 불경스럽지 않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을 달리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광의 빛은 우리에게 다르게 말씀하시는데, 현세에서 그의 판단이 불가해한 의(義)의 하나인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고 명백한 의(義)의 하나님이신 것이 내세에 우리에게 밝혀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때까지, 우리는 오직 자연의 빛과의 관계에서 유사한 예가 되는 은총의 빛을 교훈으로 삼아 깨우침과 확증을 얻어 이것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20]
2) 존 칼빈의 종교개혁과 “하나님의 영광”
존 칼빈(John Calvin) 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옆에 위치한 피카르디 지방의 도시 노용 출신으로 1509년에 출생하였다. “존 칼빈”은 영어식 이름이며, 그의 본래 프랑스식 이름은 “장 코뱅”(Jean Cauvin)이다. 흔히 우리가 그를 부를 때 사용하는 “장 칼뱅”(Jean Calvin)은 장 코뱅의 라틴어식 이름이다.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종교개혁의 꿈을 현실로 펼쳐나갔다. 이 “제네바”라는 도시는 프랑스에 속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전적으로 스위스에 속한 것도 아닌 상태로 다소 이례적으로 16세기에 독립되어 1798년까지 독립성을 유지한 도시였다.[21]
종교개혁 제2세대라 불리는 칼빈은 제1세대에 속하는 루터 및 그 외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에 대한 윌리스턴 워커의 지적은 다음과 같다:
“종교개혁 제2세대 개혁자인 칼빈은 “창조적” 사상가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루터가 해놓은 수고가 없었다면 그의 작업이 이루어 질 수 없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였다. 그는 루터의 이신칭의와 하나님의 약속의 징표로서의 성례 개념을 수용하였다. 그는 부처(Bucer)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예를 들자면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하나님의 영광, 기독교인의 확신의 교리로서의 예정,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사는 삶을 위한 불굴의 노력 등에 대한 강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조직화하고 명료하게 한 것은 칼빈 자신의 능력이었다.”[22]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칼빈이 담당했던 역할의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되지 않는다. 그의 종교개혁사적 중요성에 관하여 티모시 조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츠빙글리가 이미 죽었고, 에라스무스가 죽어가고 있었으며, 루터는 비록 완전히 침묵하지는 않았더라도 활동이 뜸해졌으며, 로마 가틀릭은 재흥하고 있었고, 급진적인 종교개혁은 뮌스터의 유혈 폭동으로 인하여 산산조각 나고 곧 바로 더욱 더 불신 받게 될 바로 그 시점에, 칼빈은 새로운 운동의 지도자이자 새로운 신학의 재 조직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23]
계속해서 티모시 조지는 칼빈의 신학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칼빈의 삶을 묘사하였다:
“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말씀의 신실한 종이 되는 것이었다. 그의 증언으로부터 방출되는 빛은 확실히 그 자신의 광휘의 반영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계시된 참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향하게 하는 조명의 수단-어둠 뒤편의 빛(post tenebras lux)-으로 여전히 빛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칼빈 신학의 핵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빌헬름 니이젤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상이 칼빈 신학 전체를 꿰뚫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칼빈 신학 이해의 마지막 열쇠이다. 이러한 하나님 개념과 연결된 예정의 교리가 그의 신학체계의 정점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은 여기에서 연역된다”.[24]
그리고 에른스트 트뢸취는 칼빈의 사상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주요 논점은 피조물의 자기 중심적인 개인적 구원이나 신적인 사랑의 의지의 보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것은 선택의 거룩한 행위에서와 유기의 무익한 격노에서 동일하게 찬양된다.”[25]
칼빈의 신학과 경건 그리고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가톨릭 학자인 “루이 부이에”가 말한 것으로도 확증될 수 있다:
“개신교 영성에 대한 칼빈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그의 하나님의 영광 개념이었다. 혹은 더 낫게 표현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기독교의 최종목적으로 삼은 것이었다.”[26]
실제로, 칼빈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길 소원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과 원리도 “하나님의 영광”이라 말한다:
칼빈은 성경을 강의할 시작할 때마다 짧게 기도를 드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칼빈의 신학과 삶과 마음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되어 있다는 이 사실은 우연한 일일까? 아니면, 칼빈의 의도에 의한 것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그가 1539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사돌레트(Cardinal Sadolet)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을 그처럼 자신에게만 한정하고,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열심을 자기 실존의 가장 중요한 동기로 삼지 않는 것은 그리 건전한 신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태어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바(로마서11:36), 만물은 그에게 돌려져야만 한다.”[29]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칼빈이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인가? 어차피 세상의 일이란 나름대로의 원리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데!”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온 힘과 마음을 다할 때, 사회적인 개혁 가능해진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칼빈이 이처럼 온 힘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을 때, 사회는 어떻게 하나님의 손 안에서 재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30]
먼저 칼빈이 기독교인들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하였을 때, 이는 자연스럽게 노동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확신과 더불어 선한 행실에 대한 열심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수공업과 상업을 명예로운 일로 인식하게 되어 근대 자본주의의 터가 마련될 수 있었다. 이것은 경제적인 상황이 종교적인 관점을 규정한다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에 대한 반론으로서, 종교적 관점이 경제발전을 규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칼빈의 협의체적인 장로제 교회(Presbyterian Church)는 자주적이고 자치적인 사회의 형성을 촉진시켰으며 간접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는 신앙이 결코 사회를 외면하거나 내세지향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그 정점으로 하고 또 그 목적으로 하는 칼빈의 신학은 많은 이론들 중의 한 이론으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중요하고 큰 주제이다. 교회와 성도는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과 신앙은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사역에 있어서 언제나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는 이러한 신앙과 신학을 우리는 칼빈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엘 비키는 이러한 칼빈주의의 성격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하였다:
“칼빈은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주와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국면을 그리스도의 통치권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이것이 칼빈주의가 단순히 한 가지 주요 교리 또는 칼빈주의 5대 교리, 혹은 칼빈주의 10대 교리, 칼빈주의 20대 교리로 제한해서 설명될 수 없는 이유이다. 칼빈주의는 삶 그 자체만큼 복합적이다.”[31]
9. 교회의 요리문답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교회는 시대마다 필요에 따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의 신앙내용을 거듭 확인하며, 그 신앙을 변호하고 설명하고 고백하며 교육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이다. 이것들은 성도들의 교육과 훈련이라는 내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참된 교회의 신앙을 파괴하는 이단들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대적해야 하는 외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교회의 “요리문답서”들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주제가 변함 없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제네바 요리문답은 칼빈에 의해 1536년에 처음 작성되었고, 1538년, 1541년, 1546년에 개정되었다.
교사 –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학생 –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교사 –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학생 –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서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삶의 시작이시므로 그의 영광에 우리의 삶을 헌신하는 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교사 – 사람의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
학생 – 동일한 것입니다.
교사 – 그것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학생 –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상태는 짐승의 상태만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
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3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1647년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에서 청교도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질문 1. –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대답. –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
10. 마치는 말
성경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모든 영광을 그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능력보다 더 큰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몽골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더욱 성숙해 지길 바라며….
[1] “영광”이란 낱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참고하여, 다시 내용에 따라 새롭게 정리하였다.
Gerhard Kittel, 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ans. Geoffrey W. Bromiley, Vol. II.
William L. Holladay, A Concis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R. Laird Harris, ed.,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Vol. 1, Vol. II, Index Vol.
한국성서연구원, 성서원어 구약신학사전, Vol. I.
성서원어 신약신학사전, Vol. II.
성서교재간행사, 성서백과대사전, Vol. 8.
Jonathan Edwards,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2] 우리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다음 사건들을 통해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 느부갓네살 왕이 소처럼 풀을 먹으며 일곱 때를 보낸 후에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되었다 (단4:1-37).
2.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금 은 그릇으로 술을 마셨을 때, 손가락이 나타나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씨를 쓴 사건이 있었다. 이 글씨의 내용은 벨사살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족하여 그의 나라가 끝나게 된다는 것이었다(단5:1-31).
[3] 참고, F. L. Cross, E. A. Livingstone,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Revised.
[4] Webster’s New Collegiate Dictionary.
[5] 중세의 시기를 산정하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중세교회의 틀을 잡은 그레고리우스가 교황으로 등극한 590년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년까지를 중세라 칭하고자 한다.
[6] “부활, 재생”이란 뜻으로 14-16세기에 언어와 예술분야에서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고전적인 문화의 부활을 추구하던 운동이다. Renaissance(르네상스)는 원래 프랑스어인데 영어에서도 그대로 차용한 낱말이며, Rinascimento(리나시멘토)는 이탈리아어이다
[9] 종교개혁 직전 중세 후기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는 아래의 자료들을 참고하라.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Vol. II, trans. 서영일, 중세교회사, 170-190.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4th edition, trans. 송인설, 기독교회사, 상권, 417-444.
Thomas M. Lindsay, A History of the Reformation, Vol. I. trans. 이형기, 차종순, 종교개혁사(I), 15-127.
차종순, 교회사, 200-209.
이형기, 세계교회사, Vol. I, 655-712.
[10] 본 글의 성격상 루터의 회심과정과 복음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은 생략하기로 한다.
[11] Roland H. Bainton, Here I Stand: A Life of Martin Luther, trans. 이종태, 마틴루터의 생애, 27.
[12] Patrick Collinson, The Reformation. Trans. 이종인, 종교개혁, 29-30.
[13] Alister E. McGrath, Reformation Thought: An Introduction, trans. 박종숙, 종교개혁 사상입문, 24-25.
[14] Heiko Augustinus Obermann, Luther: Mensch zwischen Gott und Teufel, trans. 이양호, 황선국,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 루터, 68.
[15] Philip S. Watson, Let God be God!: An Interpretation of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 trans. 이장식, 프로테스탄트 신앙원리, 112 이하.
[16] Ibid., 49.
[17] Ibid., 115-116.
[18] Ibid., 60-61.
[19] Ibid., 36에서 재인용.
[20] E. Gordon Rupp, ed.,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Ichthus Ed.: Luther and Erasmus on Free Will, 331-332.
[21] Patrick Collinson, op. cit., 123-124.
[22]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4th ed., Vol. II. Trans. 송인설, 기독교회사, 하, 531-532.
[23] Timothy George, Theology of the Reformers, trans. 이은선, 피영민, 개혁자들의 신학, 201.
[24] Wilhelm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trans. 이종성, 칼빈의 신학, 15.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Kurt Dietrich Schmidt, op. cit., 383-384를 참조하라.
[25] Ernst Troeltsch, 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Vol. 2, 583.
[26] Louis Bouyer, A History of Christian Spirituality, vol. III, p.93.
[27]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I-VII-1.
[28] Ford Lewis Battles, ed., The Piety of John Calvin, trans. 이형기, 칼빈의 경건, 177.
[29] Calvin, “Reply by John Calvin to the letter by Cardinal Sadolet to the Senate and People of Geneva”, in J.K.S. Raid, ed.,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Ichthus Ed.: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228.
역사적으로 칼빈주의(Calvinism)와 자본주의(Capitalism)와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칼빈주의에 근거하여 자본주의가 생성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칼빈주의의 윤리와 정신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일부분 공헌하였다는 것은 대체로 인정을 받고 있다. 아래의 도서들을 참고하라: Max Weber,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trans. 김덕영,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William Stanford Reid, Was John Calvin the Founder of Capitalism?, trans. 홍치모, 요한 칼빈의 자본주의의 창시자인가?.
[31] Joel R. Beeke, Living for God’s Glory: An Introduction to Calvinism, trans. 신호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 칼빈주의, 22.
[32] John Dillenberger, ed., John Calvin: Selections from His Writings, 249.
[33] 이형기, 세계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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