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파이퍼 목사
내가 대답하고자 하는 이중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그 절정에 이르는 인류역사에서 하나님의
목적 혹은 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목적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어떠해야 하는가?
왜 이 질문을 하는가?
이 질문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아버지가 가장 소중하게 마음에
품고 계신 그 목적에 대해 민감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매우 오만하고 은혜를 모르는 아들이다. 성실한
아들은 그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아버지의 가장 깊은 의도와 맞추기 위하여 그것을 알고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혹은 달리 말해서,
어떤 사람의 마음을 가장 깊이 감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까지는 당신은 진정으로 그를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강렬한 소망과 또 그의 모든 행동을 유도해 내는 목적을 알지 못한 채 그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를
예배하거나 그를 닮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만일 우리가 당연히 하늘
아버지께 예배 드리고 또 그를 닮아가는 그의 성실한 자녀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 한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최고 목적은 무엇인가?
기본적인 가정
이 질문은 내가 솔직해야 하고 또 성경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이 질문을 할 때에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그가 역사라고 부르는 이 거대한 드라마의 저자요 감독이시며, 그가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만물을 설계하시고 배치하신다는 것을 가정한다. 나는 언젠가 휘튼대학의 클라이드 킬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이 세상이 천치가 아니며, 부재지주에 의해 경영되는 것도 아니며, 오늘 바로 이 날에 스스로 알파와 오메가라 하시는 그 설계자에 의해 추가되는 환 획이, 조만간
내가 기꺼이 이해하게 될 그 우주적인 화포에 어떤 한 획으로 더해지고 있다는 가정에 내 목숨을 걸 것이다.
이 가정은 성경에 잘 근거하고 있다.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바로 그 사실은 그가 태초부터
역사 속에 일정한 목적을 정해 놓으셨고, 이 목적은 좌절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9-10)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애가에서 나라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숙고하며, 주님께서 정하지 아니하시면 그 어떤 사람의 명령도 결코 시행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애3:37,38. 참조. 사45:1-7)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발견한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에 모여
이렇게 기도하였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4:27;28)
하나님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좌절시키지 못한다; 그들은 그의 정하신 뜻을 실행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결말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역사의 결말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수행하는 모든 왕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 계시록 17장에서 요한은 열 개의 뿔과 짐승 그리고 음녀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은 열 명의 왕들과 적그리스도
그리고 로마이다. 16절과 17절의 말씀이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이것은 잠언21:1의 말씀과 같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본문들로부터 하나님은 오직 왕들과 군주들 그리고 군사지도자들의 일들만 감독하신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아니, 그는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것처럼 개인들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애굽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이야기의 결말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사람들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결코 좌절시키지 못한다.
잠언의 저자로 하여금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라고 고백하게 한 것은 필시 이와 같은 이야기들과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그러한 많은 체험들일 것이다.
다른 본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참조. 16:9, 렘10:23, 엡1:11,
마 10:29).
요약하자면,
내가 대답하길 원하는 첫 번째 질문은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고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내가 증명하고자 노력한 가정이 성경적이라는 것,
곧 하나님은 참으로 역사 가운데 어떤 목적 혹은 목표를 가지고 계시며, 그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의 주권적인 능력과 지혜를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이 포함된다.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고 목적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그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연속되는 구속사의 중대한 시점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 의미를
밝힘과 동시에 이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우리가 그 본문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성서의 용어에 관해 한 마디 하고자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다중적인 완전함의 아름다움과 관련된다.
그것은 그의 장엄하심과 순수하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어떠하신지를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모든 것의 충만함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 용어는 때때로 그의 능력과 지혜와
자비와 정의 같은 그의 서로 다른 속성들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각각 그 중요성과 성질에
있어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의 극히 아름다운 존재 속에
스며있는 그의 모든 속성의 완전한 조화이다.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용어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할 때, 그것은 사실상 그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모든 완전하심 가운데 계신 그 분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의 영광이
언급하는 것이며, “영광”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을 더욱 분명하게
명시하는 것인 반면에 “이름”은 그 본질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논점에 있어서 꼭 알아야만 하는 중용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목적과 그의 이름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목적은 동일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이제 구속사의 중요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 보여주는 몇몇 성경구절들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이사야 43장에서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을 향한 그의 위대한 사랑을 표현하신다.
6-7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본문에 의하면,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영광이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영광에 부족함이 있거나 결코 하나님이 아니셨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론해선 안 된다. 바울은 사도행전
17:25에서 이렇게 말한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는 그에게 부족한 영광을 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보여주려는 성향에 의해 움직이셨다. 가득 찬 샘이 넘쳐 흘러 물줄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넘어서 그의 영광을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은 창조된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한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 민족을 통하여 온전히 그의 영광을 위해 그의 특별한 구원행위를 수행하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이사야49:3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그리고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어떻게 반복하여 행동하셨는지 하나하나 열거한다.
예를 들자면,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셨을 때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에스겔20:8-9에 의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눈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행하였음이라.
이처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그가 출애굽기14:4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의 안식일을 더럽혔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관해서도 동일한 것이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따라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라…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막아 달리 행하였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여러 나라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겔20:13-14,16,22)
마찬가지로,
가나안 정복과 이스라엘의 번영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행동하셨던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다윗은 사무엘하7:23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관련된 본문들은 건너뛰고,
곧장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유수된 것을 보게 되는 구약성경의 역사 마지막으로 가보자. 여기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그의 택하신 백성과 완전히 관계를 끊으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그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또 그의 영광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또 다시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시고 그의 진노를 보류하신다. 이사야48:9-11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이것은 이사야가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선택한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에스겔이 그 동일한 하나님의 결심을 기록한 것을 제시해 본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겔
36:22,23,32)
이 본문에 의하면,
창조로부터 바벨론 유수 이후에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기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위대하신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이름에 합당한 명예를 유지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속사역으로 돌아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우리를 위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에베소서 1:5-6에서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셨는가? 그의 은혜의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찬송 받게 되기를 위함이다.
그의 은혜가 칭송 받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목적을 알고 계셨기에 이 열렬한 목적을 그의 지상사역으로 삼으셨다.
그의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12:27,28,
참조. 13:31)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그의 마지막 기도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 그가 하셔야만
했던 사역은 그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역사의 절정에 관한 마지막 한 설명에서, 요한은 21장에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는 바, 그것은 대단히 상징적이며 아마도 영광스럽게 된 교회를 언급하는 듯하다 (계21:2). 23절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바울은 이미 신자들의 위대한 소망이란 하나님의 영광임을 말하였다 (롬5:2, 8:18, 고후4:17).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그 안에서 살게 될 빛이라는 아름다운 상징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묘사된
것을 본다. 선택된 자들에게 영광을 나타내시는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기도하신 말씀에 의해 확증된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7:24)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위대한 소망과 운명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가지고 계신 그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며(요일3:2) 사랑과 찬양으로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바로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에 있어서,
그리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고목적은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위대하신 이름에
명예와 찬양을 돌리는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사람의 응답
우리 아버지의 목적에 관하여 이제 우리가 알게 된 내용에 비추어, 성실한 자녀로서 우리의 응답은 어떠해야 할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에서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한다.
즉,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우리의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그 대답은 이러하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단연코 갱신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와
사람이 그 일을 하는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명확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의 의미를 중대하게 오해한 한 가지는 만일 우리가 이렇게 응답하면
하나님께서 더욱 영광을 받으시고, 만일 우리가 저렇게 응답하면
하나님께서 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완전하게 드러내시기 위해 사람에게
의존하지 아니하신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모욕하거나 그를 모독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롬2:23이하). 이 말의 의미는 불신자에 의해서 하나님의
명예와 그의 이름에 가해지는 훼손은 단지 겉보기이며 일시적인 겉보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모욕과 모독,
그의 영광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을 찬양하고 그러한 것을 현재
눈에 보이게 하는 일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심판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대에서 부인되었던 그의 모든
영광을 되찾으실 것이다.
예를 들자면,
승리의 영광을 쟁취하려는 최종목적을 가진 한 지혜롭고 유력한 장군이 전술상 조용하게 그의 군대를 후퇴하게 할지도 모른다.
겉보기상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그의 적들은 장군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그 명예로운 전쟁의 천재는 어디에 있는가?” 그때 갑자기 밤의 도적처럼 그가 측면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적들을 쳐부순다. 그러자
온 세상은 그 장군의 지혜와 인내심에 감탄한다. 그는 일시적인 겉보기상의 패배를 허락했기 때문에 결국은 더
큰 영광을 얻는다.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아무도 그의 영광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을 궁극적으로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는 불순종마저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롬3:5-7).
그러면 만일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하거나 더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촉구하는 성경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고전10:31). 먼저 로마서 1:20-23을 살펴보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본문에 의하면 인간의 주된 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반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명예롭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영화롭게 함이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이 구절에는 두 개의 단서가 주어져 있다. 하나의 단서는 21절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언급이다. 바울은 이 주제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기록된 시편50:23에서 취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 감사하는 것은 그를 영화롭게 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당신의 마음이 온당하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충만할 때에, 당신은 온갖 좋은 것들을 주시는
그의 영광스러운 충만함을 인정하며 증언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의 의미에 대한 두 번째 단서는 23절에 언급된 “바꾸다”라는 낱말이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즉,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비천하게 평가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일이라면, “지혜로운” 자들은 그 반대로
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 무엇보다고 높이 평가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당신이 사랑하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그의 영광을 더욱 사랑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 사랑에는 그의 영광을 기뻐하여 그 어떤
것도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포함된다.
이와 같이,
로마서1:20-23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이 가장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의 응답에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응답 그 가운데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기자가 말하였듯이 그 분 안에서 만족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
73:25-26).
이러한 마음과 정신의 자세는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충분한 아름다움을 찬양이란 거울로 그에게 되돌려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기쁨으로 충만한 감사하는 마음이란 기초-가 놓여진 다음에,
신약성경은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하는 행위들을 열매 맺을 것임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내가 아는 한, 그 원리는 이러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분깃이 될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기뻐하고 만족할 때(엡1:6), 우리는 하나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로, 즉 그들의 유익을 구하는 데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당신의 마음이
만족함을 얻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희생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가장 분명한 외적 증거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을 몇몇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입증할 수 있다. 아마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우리의 의무와 전적으로 관계된 가장 친숙한 본문은
고린도전서 10:31-33일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을 수 있는가? 그 문맥은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밝혀준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그저 이런 뜻이었다:
만일 당신이 먹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해친다면, 혹은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거나 그들에게 장애물이 된다면, 그것을 먹지 말라. 비록 그것이
자기 부정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 이것은 그가 24절에서 말한 것과 같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13:10에서 사랑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먹거나 마시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것은
사랑 안에서 먹고 마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유는 당신이 이기적일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의 갈망을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영광스러우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이해시키기 때문이다.
사랑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본문은 빌립보서1:9-11이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의의 열매로 가득하게 되는 때이다. 이것은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하게 될 때 실현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통찰로 특징 지워지는 사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자신은 포도나무요 그의 제자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실 때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셨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맺힌다고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요15:5).
그리고 우리가 의의 열매로 가득할 때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8절에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2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 열매가 무엇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랑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자면, 그는 마태복음 5:16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참조. 벧전2:12).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착한 행실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나머지 산상설교 가운데 명확히 설명되어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착한 행실들의 절정은 마태복음 5:44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람들 앞에 당신의 빛을 비추는 것은 결국 당신의 친구들과 당신의 원수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복음의 빛으로 당신의 마음이 든든하게 되고 만족하게 되었을 때에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고후4:4).
내용 요약
태초부터 종말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고목적은 그의 위대하신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무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위들을 이 목적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먼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그의 영광을 더욱 기뻐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이 기쁨의 자연스런 결과로, 우리는 이기심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의 영광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역사에 있어서 그의 목적을 성취하는 주된 수단이 된다
By John Piper. ©2012 Desiring God Foundation.
Website: desiringGo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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