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윤탁 목사 (남대문교회)
들어가는
말
토착화란 남의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몽골문화나
한국문화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를
몽골의
종교로, 혹은
한국의
종교로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토착화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문화의
옷을
입고
삽니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
문화의
옷을
입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배우고, 미국
사람들의
생활에
밴 습관을
익힙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이
됩니다.
복음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문화
속에서, 유대인들이
먹는
음식을
잡수셨고, 유대인들의
생활
풍속을
따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입는
옷을
입으시고,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로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목수로서
집을
지으실
때에는
한국이나
중국의
건축
양식이
아닌
나사렛
사람들이
원하는
양식으로
건축을
하셨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실
때에도
유대인들의
생활
풍속을
근거로
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셨을
것이란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토착화를
말할
때에는
복음이라는
씨앗과
문화라는
토양을
구분합니다. 몽골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몽골의
토양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몽골의
기독교가
됩니다.
당연한
표현입니다만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의
기독교”
입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영국에서, 호주에서, 그리고
캐나다에서
한국에
왔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자라난
기독교는
미국의
기독교가
아니며, 영국이나
호주
혹은
캐나다의
기독교도
아닙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외국의
기독교와는
다른
기독교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한 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되기까지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만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토착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합니다.
처음 복음이 전파될
때에는, 그 복음을
전하는
외국
선교사들의
옷을
입고
복음이
들어오게
됩니다. 선교사들이
입고
온 옷은
그들의
문화입니다. 부득이
합니다. 그 옷을
벗기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복음에 새 옷을
입히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옷이나
입힐
수는
없는
일입니다. 복음에
맞는
옷이
있습니다. 그 옷을
찾아야만
합니다. 복음이
훼손되지
않게
새 옷을
입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란 씨앗이
각 나라의
토양에
뿌리를
잘 내려서
그 토양에
알맞은
기독교로
잘 자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토착화”이며
이 토착화
과정을
거쳐서
생성된
신학이
“토착화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토착화
신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토착화
신학”을 아무런
기준도
없이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과정과
작업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토착화
과정에서
복음이
손상된다거나
기독교의
본질이
흐트러지면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 혼합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토착화
신학”을 다룸에
있어서
꼭 명심해야
할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들을
개혁교회의
복음적인
입장에서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토착화
신학의 올바른 기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신학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비복음적이고
비상식적이라
할지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의
신학을
정상적이면서도
복음적인
신학으로
이끌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처음
교회에
출석한
성도가
“하나님은
나를
벼락부자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내 남편이
되게
해 주실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고
합시다. 그 성도는
그런
생각을
자기
신학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기독교
신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보편적이며
정상적인
기독교
신학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건강하고
바른
신학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첫째, 바른
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은 “성경중심의
신학”입니다. 그것은
늘 새롭게
개혁되어야
함을
강조하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성경입니다.
아이러니한 말이기는 하지만, 성경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된 책들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경을
그저
우리가
참고해야
할 하나의
고전(古典) 쯤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혁을
하고, 새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사상이라
할지라도, 또 아무리
좋은
이상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성경에
어긋나는
신학은
바른
신학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많은 나라들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토착화
신학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토착화
신학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판단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4:6). 예수님
외에는
천하
인간들
중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선포합니다(행 4:12).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갈 1:8).
그런데 토착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성인이나
위인들의
업적과
성품을
들먹이며
이들을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앉히려고
시도한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은
신학도
아니고
토착화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학의
첫 번째
기준은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둘째, 바른
신학은 역사적이어야 합니다.
바른 신학은 과거
2천년의
기독교
역사와
부합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과거의
역사를
존중합니다. 그래서
교회역사를
공부하고, 교리를
배웁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교회는
역사
속에서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교회는
회의를
소집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해
왔습니다. 그리고
회의를
통하여
그 시대의
문화와
환경에
맞는
신앙고백과
지침들을
결정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공동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이나, 신앙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삼위일체
및 요리문답과
같은
기초적인
교리들도
모두
역사적인
근거를
갖는
중요한
신학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역사적으로 분명한
근거를
가진
내용이라
할지라도, 성경과
반대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마리아
신모설이나
종신
처녀설, 그리고
교황무오설과
같은
교리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금주금연운동을
실시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술을
멀리하라”는 말은
성경에
있지만,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은
성경에
없으므로
자유롭게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미국이나
유럽의
목사들
중에는
흡연을
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고
하면서
한국교회의
금연전통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금연”이란
문제는
이 주제로
회의를
하였다거나
구체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었다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건강을
위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톱니바퀴에
모래를
붓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땅콩박사로
알려진
조지
와싱턴
카버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도록
허락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코를
머리
위에
굴뚝
모양으로
만드셨을
것”이라고
하면서
금연운동에
앞장을
섰습니다. 이런
문제는
성경이나
역사에
근거하여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실제적인
삶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학의
세 번째
기준은
실제적(Practical)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바른
신학은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이론이나
신학은
바른
신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중세시대의
교회가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기껏
연구한다는
것이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와서
앉을
수 있을까?” 하는 쓸데없고 무의미한
논쟁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
와서
앉을
수 있건
간에
그것은
우리
신앙과
신학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학은
실제적이면서도
실천적이어야
하고, 또 상식적이면서도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았고, 운동력이
있고,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히 4:12)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토착화
신학을
말할
때 이렇게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신학을
해야만
합니다.
몽골교회의 토착화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적이면서도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러면서도
몽골의
역사와
문화, 몽골
사람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신학이어야
합니다.
모든
신학의 텍스트는 성경입니다.
문화에는 본질에 해당하는
내용과
껍질에
해당하는
형식이
있습니다. 당연히
내용이
중요합니다. 알맹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형식도
중요합니다. 농부가
콩을
수확하기
위해
밭에
갔습니다. 그런데
콩이
모두
껍질에 싸여 있었습니다. 농부는
“내가
필요한
것은
알맹이들인데
왜 다 껍질
속에
있는
거야?” 하고 모든 콩의
껍질을
다 벗겨버렸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요? 그 콩이
계속
자랄
수 있을까요? 아니죠. 콩은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껍질이
사라진
순간부터
콩은
말라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하고
궁극적인
것은
알맹이지만
껍질의
중요성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일정한 형식과
절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이
있고, 봉헌이
있고, 기도가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있고, 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성질
급한
젊은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이 왜 필요합니까? 내용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형식적인
예배는
더 이상
무의미하니까
드리지
맙시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형식이
없는
예배가
가능할까요?
껍질 없이 알맹이가
존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중요성과
우선순위를
확인하고
설정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알맹이에
해당하는
텍스트(Text)가 중요합니다. 예배의
알맹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껍질에 해당하는
형식이
필요합니다. 예배의
껍질은
예배형식과
관계된
문화입니다. 문화는
컨텍스트(Con-Text)입니다.
예배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므로
그 분의
뜻에
맞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의
형식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순서와
절차가
필요할까요? 우리의
문화, 우리의
생각, 우리의
방식이
반영된
절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바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토착화
신학의
과제라
하겠습니다.
“토착화 신학”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변질시켜
버린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복음은
씨앗입니다. 몽골에서의
토착화
신학은
그 복음의
씨앗을
몽골의
토양에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몽골의
땅에서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씨앗
자체를
바꾸려고
시도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같은
씨앗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것입니다.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십니다. 정말
존경을
받을
만한
분들이십니다. 저는
그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분들의
교훈과
가르침대로
살 수 있도록
우리
주께서
힘을
주시고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자
성인들이기는
하지만, 나의
주인이
되거나
나를
구원해
주실
분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같이
앉을
수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저는 공자와 맹자를
배웠습니다. 석가의
가르침도
배웠습니다. 부득이하게도
저는
그분들의
영향을
받아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그 분들의
교훈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제 삶의
껍데기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더욱
옳고
바른
삶을
살기를
원하여
인류의
훌륭한
스승들이신
그 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분들의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마다 그리고 각 나라마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많은
스승들과
경전들이
있습니다. 그 스승들과
경전들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하나입니다. 그 복음은
성경만이
가르쳐
주고
있으며
이 성경이
바로
우리가
토착화
신학을
하는
텍스트(Text)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문화, 한국의
문화, 몽골의
문화는
이 텍스트를
적용하는
컨텍스트(Con-text)일 뿐입니다.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위치가
바뀌거나
씨앗과
토양의
위치가
바뀌는
것, 그리고
복음과
문화의
위치가
바뀌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의
신학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서양의
가방문화와 한국의
보자기문화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올 때에는
성경을
가방
속에
넣고
왔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들고
온 성경은
모두
한국
사람들이
번역한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한국정부에서는
성경
읽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가방을
열어보아야만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교사들이 먼저
그 가방을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가방
속에는
청진기와
수술도구들과
의약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 의학
서적들과
물리학, 화학
책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가방의
가장
밑바닥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한참
후에야
그 성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는
보자기문화입니다. 서양의
가방문화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빈 가방은
들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 보자기는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하고,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기도
하고, 손목에
매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필요하면
그 보자기에
물건을
싸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보자기는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그 안에
담겨진
것이
무엇인지
그 모양이
다 드러나
버립니다. 책을
싸면
보자기는
책 모양이
되고, 주전자를
싸면
주전자
모양, 그릇을
싸면
보자기는
그릇
모양이
됩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한국
사람들이
선교사가
되어
외국을
방문할
때는
그들도
가방을
들고
갑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보자기문화는
쉽게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한국
사람은
5분만
지켜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곧 다 드러나
버립니다.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선교사인
것이
다 드러나
버립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보자기문화
때문에
무엇을
숨기지
못하고
솔직하게
다 드러내
버립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한국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잘 적응하고
또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하지만
보자기처럼
솔직하고
모든
것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비밀을
유지하지
못하고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몽골의 문화와 토착화
신학은...?
그렇다면 몽골에 대해서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몽골의
문화는
“기마문화”라 여겨집니다. 몽골민족은
기마민족입니다. 몽골의
기병대는
뛰어난
용마술로
세계를
제패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아직까지
몽골민족이
이룩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거대한
제국을
이룬
민족이
없습니다.
문화는 계승되는 것입니다. 세계화를
이야기하는
오늘날, 몽골은
또 다시
세계를
향하여
원대한
꿈을
펼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은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무장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최초의
선교사를
원나라에
파송한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로마
교황청의
선교사가
몽골의
황제를
알현하고
나오면서
우렁찬
교회의
종소리와
찬송
소리에
깜짝
놀랐다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몽골교회의 토착화 신학은
다른
민족의
그것과는
구별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 어느
민족의
토착화
신학보다도
더 큰 꿈과
포부가
있는
신학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서양의 가방문화를
이야기하고, 또 한국의
보자기문화와
몽골의
기마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른
토착화
신학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지금 토착화
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으로서
평생
동안
한국문화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제가
몽골의
입장에서
토착화
신학을
말한다
해도, 제가
몽골의
문화
속에
젖어
있지
않기
때문에
왜곡된
생각을
가질게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몽골에서 수십
년씩
살아온
한국이나
서양의
선교사들이
몽골의
토착화
신학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몽골에서
태어나
몽골에서
살아온
몽골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정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몽골
사람의
입장에서
그것을
수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반드시
재 토착화되어야만
합니다.
다음에는 토착화 신학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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