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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프리스트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1:15-23).
골로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르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마음을 집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서신을 쓰면서, 그의 다른 많은
서신들과 동일하게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방문해 보지도 않았고, 그가 세우지도
않은 교회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7절에서 이 교회가 바울의 동역자인 에바브라에게서 복음을 배웠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비록
이 교회에 가 본 적은 없었지만, 그들에 대해서 들었고 또 그가 다른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하듯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가
기도하는 내용을 3절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골1:3-5).
바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패턴(pattern)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또한 그들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의 기도는 다른 서신들에서와 같이 동일합니다; 우리는 9절에서 그것을
보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1:9-10).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사랑이 자라기를 기도하며, 이것이 그들의
부르심에 합당한 그리스도와의 일치된 삶 안에서 열매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기도하는 것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회고하는 것과 아버지께 감사 드리는 것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때문입니다:
...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1:12-13).
그리고 여기에서 바울은 시적인 문체로 바꿉니다. 우리는 바울이
이 글을 즉석에서 썼는지, 아니면 이 글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읊거나 노래하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춘 짤막한 시 혹은 찬송인데, 유례없이 치밀하게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우리는 성경의 다른 본문들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요한복음4:24)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저 같이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에게는 집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서
그의 집 문을 두드릴 수도 없고, 그를 땅으로 끌어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도처에 이런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신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됨은 어찌된 연고인가?”
요한복음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1:18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품 속에 계셨으며 그가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히브리서1장 3절입니다. “이는(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알길 원한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길 원한다면, 예수님을 통해야만 합니다. 유일하게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계시이시며,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보면, 제자였던 빌립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14:8-9).
예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압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라 말합니다. 이에 또 우리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의아해 합니다. 우리가 “처음 난 자”라고 할 때는
자연스럽게 그 말씀을 ‘먼저’와 ‘나신 이’ 두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하며, 보통 처음 태어난
자를 말합니다. 아이들은 동시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쌍둥이라
할지라도 하나가 먼저 태어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는 ‘먼저 났다”는 의미의 변화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변화입니다. 다른 많은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사회에서도 ‘먼저 난 자’는 장자이며
으뜸되는 지위와 유산 중 최대의 몫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되풀이해서 사용하는 의미입니다; 먼저 난 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으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편 89장에서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서 다윗 왕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시편89:27).
이것은 “처음 난 자”라고 하는 말의 의미와 정확하게 동일한 말입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의 순서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세상 왕들의 지존자로, 서열에 있어서
다른 모든 왕들보다 으뜸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골로새서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그리고 피조물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더 높은 최고이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존재들, 교회건물, 여러분의 집, 여러분의 소유물, 여러분 자신보다도
예수님은 더 위에 계십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16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몇몇 구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가 태초에 존재하셨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우리가 숙고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별들도
예수님 안에서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가 앉는 의자도 예수님 안에서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예수님 안에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머리에서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1:3).
이것이 바로 그가 만물보다 으뜸인 이유입니다. 그는 또한 만물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 범주들을 분명하게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은 ‘만물’ 곧 하늘에 있거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히브리식 어법입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여러분이 볼
수 있는 것들과 볼 수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성경은 그것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러분이 그것들을
볼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물보다 으뜸이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계속해서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고 에베소서 6장과 본 서신의
좀 더 뒤에서와 같이 몇몇 다른 곳에서, 몇 가지 종류의 영적인 세력들에게 주의를 돌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실제로
이것들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우리는 그들을
천사 혹은 타락한 천사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왕권들, 주권들, 통치자들, 권세들 같은
일종의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이상 더 많은 것은 말해주지 않으며, 그것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해 줍니다-특히 골로새인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런 세력들에 대해서 경이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그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들보다 으뜸되시며, 따라서 골로새인들이
이 영적인 세력들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염려도 그리스도가 으뜸되시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모든
것들보다 위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말씀은 “먼저 나셨다”는 것이 왜 15절에서 의미하는 바를 말하는지 우리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 줍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는 분이십니다-이것은 예수님이 다른 모든 무리들 중에서 먼저가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보다 먼저 계시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가서 보자면, 제일 첫 번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곧 시작에, 영원을 넘어 선 영원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고대에 이 사실에
대하여 오류를 범한 몇몇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창조된 분이시며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과 동일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데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단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며, 그는 창조된 피조물로서 특별하고 유일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본문에서,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며, 만물은 그 안에서
함께 세워졌습니다. 즉, 만물은 예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매 순간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책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제가 허공에서 그것을 잡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높이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렇게 하길 원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저의 의지적인 노력과 그 공간에 붙잡고 있는 제 몸의 운동에 의해서 그것은 그곳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제가 그것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손을 놓는
순간에 그것은 떨어집니다. 그것은 그 공간에서 떨어지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혼돈의 상태로 전락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만물이 그 안에
서 있습니다! 그는 그의 힘과 의지적인 선택의 노력으로 그것들을 떠받들고 계십니다. 하늘의 별들과
들판의 동물들, 우리가 앉아 있는 바로 그 의자들, 그리고 우리의
심장박동은 매 순간 예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보다 위에 계시고, 만물의 중심에 계시고, 만물은 그에
의하여 그 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16절 마지막에 보면, 만물은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만물의 마지막에 계심을 뜻합니다. 세상은 궁극적인 하나의 목적, 궁극적인 하나의
목표, 만물의 시작이요 만물보다 위에 계시며 만물의 중심이요 만물의 마지막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궁극적인 하나의 의미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문제의 일부는 태초에 만물이 예수님을 가리켰으며, 만물이 예수님에게로 인도되었으며, 만물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영광과 경배를 위하여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별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들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신 그 분의 위엄을 생각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숲으로 산책을
가보세요. 그러면 나무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술성과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여러분 안에서 설레었을 것이며, 여러분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만물이 예수님을 가리키지 않고, 우리 마음의
죄로 인하여 사물들이 우리를 미혹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대신에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들은
별들을 숭배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안내나 점성술 혹은 그와 같은 것들을 기대합니다. 숲 속을
산책하러 가보세요. 그러면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로 인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자연을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여 피조물을 숭배합니다. 우리는 사람
몸의 매혹적인 유일무이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경이와 위엄을 생각해야 합니다…그럼에도 다른
이들은 임의적인 사건들과 인간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그것들에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교회의 시작이시며, 교회의 으뜸이시고, 새 창조의 으뜸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18절과 이 단락의 두 번째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우리는 교회로 연합되어 있고, 서로에 대하여
연합되어 있고,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고, 하나의 유기체적인 관계입니다. 그가 머리이신
것은 그가 우리에 대하여 생명의 근원이 되심을 뜻합니다. 제 머리를 잘라 보세요. 그러면 저는 닭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혼란스럽고 추하게 되어 죽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몸의 나머지 부분들은 제 머리와 연결됨으로써 생명과 같은 것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생기의 근원은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머리는 상징적으로
우리 몸의 다른 부분들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것은 탁월함을 가지고 있듯이, 예수님 역시
탁월하십니다. 그는 지위와 명예와 영광에 있어서 우리보다 위에 계십니다. 그리고 머리가
우리 몸을 안내하고 지도하고 감독하듯이, 그는 우리를 안내하시고 지도하시고 감독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에 계시며, 우리를 지도하시고, 우리를 안내하시고, 우리의 원기를
북돋우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는
또한 “시작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 첫 열매”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새 사람, 새로운 인간
존재로 다시 살아나신 첫 열매로서, 새로운 창조가 어떠할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에는 만물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고통이나 아픔, 공포, 슬픔이 없도록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첫 열매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그것을 봅니다; 그것은 유일무이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요한복음 11장과 같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부활을 봅니다. 나사로는 나흘 동안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무덤 앞에 있던 바위를 굴려 옮기고, 나사로가 베로 동인 채로 이집트의 미라처럼 발을 질질 끌고 비틀거리며 나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동인 베를 풀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나사로는 그의 일상생활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죽음을 가깝게 경험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아마도 그는
새롭게 수명을 연장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일단 그런 감정을 느낀 사람은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울트라-마라톤 달리기(ultra-marathon running)와 같은 극한 스포츠(extreme
sport)를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그를 무릎 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나사로가 유대의 거리와 경주장에서 50km달리기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갑니다. 어느 날 나타난 그는 천천히 걸으며 조금 숨이 찹니다. 그의 왼팔은
따끔거리고 쑤시며, 가슴은 조이는 듯한 느낌이 있고, 공포감이 있습니다. 나사로는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번째 순간에, 나는 나사로가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죽음을 정복한 능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예수님께서 친히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 살아계시리라 믿습니다. 보세요. 나사로와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은 현세에 다시 살아났지만 다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결코 다시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첫 열매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그를 믿는 우리가 그 뒤를 이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목적, 곧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첫 열매가 되신 이유는 “그가 만물의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왜 그는 새
창조의 첫 열매이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수고를 감당하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으뜸이 되셔야만 합니까? 왜 그가 만물
위에 계셔야 합니까? 1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육체의 모습으로 거하십니다. 이러한 견해는 2장 9절에서 반복됩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조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저 잠시 동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것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으뜸이시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에,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만물의
마지막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상이 정상이 되려면, 만일 사물들이
적절하게 되려면, 구원과 새 창조와 만물의 화해를 포함하여, 그가 만물의
으뜸이 되어야만 적절하게 됩니다. 따라서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 일들 행하시기를 기뻐하셨음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팔을 비틀면서 “하나님, 당신이 저기로 내려가셔서 인간들을 구해주시고 정리를 해주시는 편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시길 기뻐하셨습니다. 그가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강요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꼭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랑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의 사랑과
기쁨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만물을 그 자신과 다시 화목화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의 피로 화평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만물들,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만물들은 회복되어 그와 화평케 될 것입니다. 여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참으로 만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거나 모든 사람이 그에게로 돌아서지 않는다는 사실과 타락하여 반역하는 영적인 세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화목하게 될까요? 그들은 어떻게 화평에 이르게 될까요?우리는 골로새서 2장 전체에 걸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과 암시를 얻게 됩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로새서2:13-14).
여기에서 바울은 우리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여러분을 향한
고소 곧 ”당신은 이러한 법들을 어겼고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는 법조문은
끝나버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취소하심으로써, 지워버리심으로써, 그 빚을 갚으심으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거기가 그 일이 일어난 곳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는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을 대적한 타락한 영적 존재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무력화하셨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그들이 어떤 권세를 가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이 실제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세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권세는 단지 사탄의
이름이 뜻하는 바 이것입니다: 그는 고소자(the Accuser)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소하게 될 자입니다. 그는 우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는 이런 짓을
하였고, 당신을 대적하였습니다. 정의로 심판하십시오.” 이것이 그의 무기입니다. 그것이 그의
주요한 무기이며 실질적으로 유일한 무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모든 권세를 무력화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고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15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묘사된
모습은 로마의 정복자, 곧 황제들 중의 한 명이나 위대한 장군들 중 한 명이 로마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들은 승리를
선전하기 위하여 그들이 패배시킨 적들을 행렬로 세우고 구경거리로 만들어서 로마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적들을 이기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화평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원치 않는 화평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을 억지로 인정하는 자들의 화평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그와 화목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반역하는 자들은 심판과 복종으로 화평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1장 마지막 세
구절의 요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모든 으뜸되심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21절의 말씀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지난 날,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화하고, 멀리 떠나, 우리 생각과 행동 그리고 삶의 방식에서 그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다시 관계를 맺으셨고, 화평하게 되셨으며, 여러분을 그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고소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의 존전에 거룩하고 흠 없고 깨끗하고, 순결하고, 결백하고, 더럽지 않고, 의롭고, 고소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23절에 보면 조건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로새서1:23).
이 말씀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단순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러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너희 믿음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의 죽음으로 성취된 모든 것, 그가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음을 믿음으로써 시작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의 지속합니까? 거기에는 비밀스런 지식이나 비결 그리고 고급과정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과 그가 이루어 놓으신 것들을 계속해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경주를 어떻게 마치게
됩니까? 우리는 같은 방법, 곧 예수님의 죽음과 그가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써 마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물 중에 그가
으뜸이 되실 것입니다.
보세요.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으뜸되심을 나열합니다: 그는 누구이십니까?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보다 위에 계시고, 모든 창조물의 장자이시고, 만물의 중심에
계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가 매 순간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는 만물의
마지막에 계십니다. 만물은 회복될 것이고, 화목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믿음에서, 그것은 사실인가? 예수님은 으뜸이시기
때문에 으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은 예수님 안에서, 그의 영원한
영광 안에서, 그가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들의 영광 안에서, 새로운 창조의
영광 안에서 보여집니다. 질문은 참으로 단순합니다-예수님은 우리 삶에서, 우리 마음에서
으뜸이신가? 그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이심으로 인하여, 모든 역사의
중심인 십자가에서 그가 이루어 놓으신 일들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창조물보다 위에 계신 으뜸으로서 그를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는가? 그는 우리에게
으뜸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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