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되지 않는 영광의 좌절감
모든 인류의 가장 바람직한 일들 중 하나는 아마도 여전히 우리의 자연적인
한계를 넘어서고, 하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경험하고, 끝 없는 평온한 바다와 안락함
그리고 햇빛 속에 잠겨보고, 하늘에 이르러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존재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나야만 했었던 이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인류는 항상 이전의 그 상태로
돌아가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몇몇 선택 받은 사람들이 마침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어렴풋이
보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는 떨며 두려워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어떤 종교에서든지, 사람들은 영광이나 내적 평화
그리고 영원에 대한 초자연적인 경험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모든 일들을 시도해 봅니다; 이상한 의식을 실행하고, 기도나 명상을 합니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도 종종 더
훌륭하게 되고, 더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붙잡기 위하여 자신을 강요합니다.
이런 종류의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심지어는 그 어떤 좌절감을 남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들로 이 내적인
공허함을 보상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정신에 대해서는 오락이나 관계 혹은 물질적인 것들을 공급하고,
우리의 영(靈)에 대해서는 온갖 종류의 예식으로
위안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내면에는 뭔가를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공허한 자아의 울음소리가 남아있습니다.
영광의 서로 다른 모습들
성경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영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성경의 영광이고, 다른 하나는 신약성경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공부하면서 모세나 다른 예언자들의 생애 동안에 있었던 기적들과 영광의 현현에 관하여 읽을 때,
그것들이 신약성경의 그것들보다 더욱 강하고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치유와 기적을 행하셨지만, 예수님은 그의 외관에 있어서 늘 아주 평범하셨습니다. 어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와는 다르게, 그의 머리에는 후광도 없었고, 그의 발자국에는 금가루도 없었고, 그가 계시는 곳에는 무지개나 밝은 빛도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하며,
병자들을 고치고, 따르는 표적과 기적으로 복음을 증거하였지만, 우리는 그들이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들은 외관상으로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내면적으로도 그들 역시 인격적인 문제들과 두려움 그리고 죄로
인하여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3:7-13)
죽게 하는 직분; 거기에 그토록 큰 영광이 있다면 왜 죽게 됩니까? 모세가 산에서 받은 돌에 글씨가 새겨진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구원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주고 죄와 그에 대한 정죄를 드러내 보여주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사람들이 율법으로 정죄 받아 죽음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멀리서나마 이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산과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에 의해 주어졌음을 보았습니다. 문제는
그 영광이 모세에게 있어서조차 계속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죽게 하는 직분, 곧 율법으로 정죄하는 직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인 성령의 직분과 비교하고 있습니다(롬8:2). 이 직분은 훨씬 더 강력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아직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단지 성전에 머물러 계셨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되도록 몇몇 경우에 한해서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육체로 사망의 법을 성취하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는 그의 성령에 의해, 생명의 법에 의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벌하고 사망을 가져오는 율법의 직분은 성취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다시 또 다시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저 선행을 행하심으로써가 아니라, 율법이 죄의 대가로
사망을 요구하는 대로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성령의 새로운
계절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머물게 하셨습니다.
이 구속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이 구속은 꿈도 꾸지 못했던 차원으로 우리를 들어올리고, 우리에게 놀라운
영광으로 인하여 그의 얼굴을 가려야만 했던 모세와 우리자신을 비교할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성령과 영광이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에 우리가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마28:20).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하여는 그들의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기록된 것처럼, 저는 오늘 우리자신이 걱정스럽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는
더 큰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둔한 마음에 우리의 영의 눈이 또 다시 수건으로 덮여 앞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을 정죄하거나 판단하고자 함이 아니라, 여러분에게서 그 수건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성전의 휘장은 찢어졌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이상 우리에게서 떨어져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돌로 된 성전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휘장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제거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의 눈에서 이 휘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법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정죄 받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직 믿음으로 취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그럴만한 자격도 없을지라도, 믿음으로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성령께로 인도함 받고, 사망과 정죄의 율법에서 자유케 되며,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가운데서 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러했었고, 여전히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단계가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숨겨진 영광을 드러내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우리는 삶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위대하신 예수님을 따르길 원하지만,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허덕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항상 그렇게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참되고 실제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자연스럽게 우리가 느끼는 것, 듣는 것,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고 다른 점이라고는 그 안에 보화가 있는 것뿐인 질그릇과
같이 깨어지기 쉬운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질그릇을 봅니까? 아니면 그 안에 있는 보화를 봅니까? 어느 것이 실재하는 것입니까? 둘 다 입니다! 그러나 그 보화는 우리에게 가치와 능력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보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의 몸에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었던 성령이 그에게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권능과 사랑과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구약성경의 사고방식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드러나는 영광을 기대하였기 때문에, 구경꾼이 되어 스릴에 열중하며
나중에는 영광을 내버리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런 사고구조 속에서 너무 자주 미끄러져
넘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심을 이해하기까지,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세상에 보여지게 됨을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당신 안에 있는 영광을 발견하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수건을 벗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빛과 영광이
방해 받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비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자신을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위대하심을 발견하는 것 같이,
우리는 우리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휘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고 사망의 법 아래 어둠 가운데 있었으며,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죄와 열등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 만드신 우리자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압니다.
그 분은 우리를 자녀로, 왕과 제사장으로, 그리고 그의 나라의 대사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일한 존재로, 각자를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반사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수건을 벗기셨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허물 없이 빛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영원히 점증하는 영광으로 자라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고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놀라운 계시를 깨닫듯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저 우중충하게만 보이던 영역들 속에서 여러분은 아름다운 색채들을 발견합니다. 질병에
시달리던 곳에서 치유를 발견합니다. 분노와 불평을 하던 곳에서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할 이유를
발견할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우울하고 문제로 가득하게 보이던 곳에서 여러분은 가능성과 희망을 봅니다.
그저 율법의 정죄를 느끼기만 하던 곳에서 여러분은 은혜의 구속을 봅니다. 실패와
약함을 보던 곳에서 잠재성과 힘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수건을 벗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영원 무궁히 머무시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영광을 여러분에게 주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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