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27, 2012

하늘이 주의 영광을 선포하고



데이빗 홀 (퍼스장로교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가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19:1-14).
영어로 된 하나님에 관한 어린이 찬송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크고, 힘 있고, 능 있어 못하실 일 전혀 없네.” 작은 어린이들은 종종 아주 단순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서술할 것을 요청 받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처럼 크시고, 그처럼 힘이 있으시고, 그처럼 능력이 있으셔서 못하실 일이 아무것도 없으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정말로 탁월하신 우리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이 못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나요?
시편 19장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이 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과 힘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엄위하심의 한 작은 부분을 다시 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또한 이 시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과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그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늘에 나타난 영광
먼저, 이 시의 저자는 우리를 둘러싼 우주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합니다. 그 첫 구절을 살펴봅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1)

이 말씀은 3000년 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약 1000년 전에 기록된 진리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이 이 시를 썼습니다. 그는 젊은 사람으로 목자였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치던 그를 취하여 노련한 군인이 되게 하셨고, 구약성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책임을 진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 시를 정확하게 언제 썼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가 이 시를 썼을 때 그는 시골에서 밤낮으로 양을 돌보며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일하던 젊은 시절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 그에게는 다른 사람과 통화할 아이폰(iPhone)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엠피쓰리(mp3)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을 때, 그에게는 위를 바라보며 보았던 것을 생각할 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의 결론은 위에 있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용한 말들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하늘(heavens)과 공중(sky)은 어떤 의미에서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수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냅니다. 이 첫 번째 구절의 대구법(parallelism)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동일한 생각을 반복하고 있지만 약간 다르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위에 있는 하늘 혹은 위에 있는 공중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땅 위에 보이는 모든 것입니다. 그는 두 개의 능동적인 동사, “선포하다나타내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두 낱말은 땅 위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것과 그가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은 땅 위에 보이는 창조된 우주에 의해 증명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영광 사이의 명백한 연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창세기 첫 장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 중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혹은 비슷한 말씀이) 반복되었습니다(1:4, 10, 12, 18, 21, 25). 창조 마지막에,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바라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1:3).
창조된 우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매우 좋고 그 자체로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이 두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셨을 때 아주 좋았듯이 우리가 우주 특별히 위에 있는 하늘을 볼 때, 그리고 하나님의 지성, 창조성, 그리고 그의 솜씨를 볼 때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그의 영원한 이해할 수 없는  영광의 그 어떤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도전하는 질문들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숙고할 그 어떤 조용한 시간을 가진 것이 언제인가? 우리가 실제로 우리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아름다움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묵상한 것이 언제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주 바쁜 삶을 살고 있고, 때로는 잠시 멈춰 서서 위에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응시할 시간조차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위를 바라보지 않을 몇몇 매우 실제적인 이유들도 있습니다. 첫째, 낮에는 해가 너무 밝습니다. 둘째, 만일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걷고 운전하고 여행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주의는 우리 주변의 땅에 집중되어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을 바라보고 위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 주변을 걷고 운전하려면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주의를 주변의 사람이나 차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 유지하고 계시는 우주의 장엄한 광경을 그냥 잊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공상과학(science fiction)이나 미래영화(futuristic movies)를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할리우드의 주기적으로 변하는 큰 파도와 폭풍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밖에 나가서 그저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경이와 하나님의 사역을 앉아서 바라보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마도 우리는 단순히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된 웅장함과 아름다움과 능력에 너무 친숙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이 손으로 행하신 일들과 영광을 선포하는 하늘에 귀를 기울일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 하늘이 선포한 것은 어떤 일이었습니까? – 하늘은 목적을 가지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으로 행하신 일과 영광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늘은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설계자, 장엄한 창조적 건축가,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규모의 기술자, 그리고 예술가의 아름답고 화려한 창조물은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창조물은 그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그 지식을 전하니 (19:2)
다윗은 우리에게 이렇게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계속됨을 깨닫게 해줍니다. 메일 매일, 밤마다 계속됩니다. 하늘은 위대하신 창조주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매일 매일 떠받치고 계신 분에 관해서 말합니다. 하늘은 무엇에 관해 말합니까? 아마도 우리는 그의 능력, 그의 힘, 그의 창조성, 그의 영원한 본성, 그의 사랑에 관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드러난 것은 어떤 지식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창조주요 설계자이신 분의 작품에 관한 지식입니다. 심지어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이제 겨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복잡성과 복잡한 사물들, 그리고 그 광대함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다윗은 제2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의 규칙성과 항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성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체 우주는 하나님에 의해 그의 영광을 위하여 완벽하게 설계되었습니다. 그의 영광의 일부분은 이 놀라운 행성 지구에 우리가 살며 숨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낮과 밤, , , 바람, 눈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게 하는 그의 완벽한 일정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계절과 시간은 행성 지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입니다. 하나님은 활동을 위한 낮과 휴식을 위한 밤을 주십니다-단지 세상을 돌리셨기에 그것은 24시간에 한 번 자전을 합니다. 저와 함께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자전케 하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적도에서의 그 회전 속도는 시속 약 1674km입니다. 지구의 질량(혹은 무게?)은 약 6.0 x 1024 kg. (6,000,000,000,000,000,000,000 tonnes 6.0 x 1021 t)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자전은 수 천년 하고도 또 수 천년 동안 계속해서 동일한 속도로 계속 되어 왔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육중한 행성이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의 훌륭함을 증명합니다.
이 자전하는 행성을 잠시 세탁기와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 년 간에 걸친 우리의 자동세탁기 경험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세탁기에서 문제를 발견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우리의 세탁기가 5년 간 고장 없이 잘 가동된다면 그것은 아주 잘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지구보다 훨씬 더 늦게 회전합니다. 그 질량 혹은 무게는 지구보다 훨씬 더 적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5년 정도만 지속 됩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깨어났을 때 오늘 지구의 자전이 멈춰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언젠가 점심식사 때쯤 지구가 가루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능에 문제가 생겨서 지구의 자전이 멈춰버릴 거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우주는 그 지식과 능력이 무한하신 장엄하신 설계자에 관하여 쉴 새 없이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결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우주는 모든 것들을 아주 훌륭하게 만드신 창조주에 관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매일 매 순간 사랑스럽게 유지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합니다.
날마다 밤마다 그의 손과 마음이 이 우주를 통제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몇몇 사람만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우주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19:3-4a)
이 세상은 아주 많은 상이한 문화들과 언어 그리고 인종들로 가득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동일한 우주를 보고 있습니다.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여기 몽골에 있는 우리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만드신 것들과 그의 지식을 보여주십니다.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포를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이 손으로 만드신 우주의 선포와 선언을 듣는 것이 얼마나 공정하고 공평한지 잠시 생각해 봅시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다윗은 이제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전체 우주를 생각하는 것에서 더욱 세밀하게 태양을 보는 것으로 옮겨갑니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19:4b-6)
만일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저자가 특별한 본보기로 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두려운 능력과 힘을 생각나게 하는 해를 좀 더 탐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가 없다면 아주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게 됨을 우리 자신에게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장엄한 지구적인 발전소는 우리의 난방장치이며 발광체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뜨거운지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학자들은 태양 바깥 테두리의 온도가 약 60,000℃ 나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양 표면의 온도는 약 1,000,000℃ 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도가 약 40℃ 만 되어도 아주 덥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에게는 태양의 열과 에너지를 묘사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주 특히 태양에 관한 모든 사진들과 과학기술 정보를 고려할 때, 다윗보다 굉장히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태양의 영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하는 망원경과 위성촬영장치 등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그는 그의 두 눈을 통하여 하늘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가 우리처럼 태양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발달한 과학기술의 혜택으로 우리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사진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사진들은 우리 영광의 하나님에 관하여 더욱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그는 그의 능력과 지식을 반영하는 이 찬란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다윗이 하나님께서 손으로 만드신 것들에 그처럼 감동을 받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러해야 할까요? 만일 다윗이 그의 두 눈으로 본 하늘에 있는 것들로 인하여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창조물들의 아름다움과 능력과 위엄을 더욱 분명하게 보는 우리는 얼마나 더 그러해야 할까요?
그의 말씀의 영광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논증, 곧 그의 기록된 말씀에 대한 논증으로 옮겨갑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9:7-11)
저자는 우주를 다스리는 물리적인 법칙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영적인 법칙으로 옮겨갑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대부분 말씀의 법(the word law)과 싸웁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법에 대한 생각이 종종 매우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법칙을 불필요한 통제나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것과 연상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다윗이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여섯 개의 서술적인 낱말들을 사용합니다 - 율법, 증거, 교훈, 계명, 경외와 법.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낱말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직접적으로 의사를 소통하시는 모든 것을 묘사하려는 시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들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것을 성경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그것이 적어도 구약성경의 첫 번째 다섯 권인 오경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듯이, 그의 말씀되어진 계시는 특별히 그가 누구이신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선포합니다. 마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손으로 하신 일들을 선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손으로 하신 일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래와 같이 묘사됩니다:
완전하다
확실하다
정직하다
순결하다
진실하고 다 의롭다
우리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는 아래와 같이 묘사됩니다:
 영혼을 소성시킨다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
 마음을 기쁘게 한다
 눈을 밝게 한다
 금보다 더 귀하다
 꿀보다 더 달다
 경고하신다
 상을 주신다
우리는 우주를 고찰할 때, 우리가 다윗보다 훨씬 더 복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가 육체적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였던 우주의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의 오심을 통하여, 우리는 계시로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우주를 놀랄만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하나님 이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것을 유지하고 계신 분이시며,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으로서 아기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벽한 증거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그의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자유의지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증거하십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네 가지 놀라운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히브리서의 저자에 의해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1:3a)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과 그의 아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옮겨갑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의 가장 중요한 분분이 사람의 창조였음을 가르쳐줍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1:26).  그러나 다윗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그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보게 됩니까?
다윗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9:12-13)
다윗은 사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잘 의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잘못과 그의 숨은 허물과 그의 고의로 지은 죄들을 통하여 왜곡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시편기자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일까요? 우리가 하늘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숙고할 때, 그리고 우리가 그의 완전하고 순결한 말씀과 우리 주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숙고할 때에,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또 다시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는지를 알게 할까요? 우리 삶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자아 중심성을 반영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주는 그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주 예수님은 그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삶은 종종 완전히 난파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삶이 그의 영광을 발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죄 많은 존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해답을 보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결백하고 큰 죄과가 없는 상태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결백하다는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 힘으로는 결백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 과거의 비난 받을 행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결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어, 이에 대적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14절에서 우리는 다윗의 생명을 주는 말을 보게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9:14)
다윗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 세상을 만드신 그 분을 기쁘시게 하고, 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시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를 반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그를 시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나의 구속자라는 마지막 두 낱말에서 그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구속자 되심을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자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발견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보존하시는 우주에서 그의 손으로 만드신 놀라운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가 손으로 하신 일들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그리고 이해를 가장 장엄하게 증거하는 것은 여러분이나 저와 같은 죄인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가 반역한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행한 모든 잘못된 것들과 우리가 행할 모든 잘못된 것들이 말소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주의 위대한 신비들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실 때, 우리의 죄 됨 대신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희생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5:21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몽골의 남녀 전통의상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델(dell)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순간을 위해 마련된 새로운 델은 아주 멋있고 깨끗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 옷을 낡고 몇 일 몇 주일씩이나 입었던 옷 위에 입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의(Jesus’ righteousness)라는 델은 우리 죄의 더러움을 완벽하게 덮어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됩니다. 비록 원래 우리의 본심으로는 결코 결백하게 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희생 안에서와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신 그를 통하여, 우리의 반역한 죄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하신 그를 통하여, 우리는 그의 의를 옷 입고 하나님 앞에 흠 없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결론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우리 삶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영광스러운 창조주, 구원자 하나님께 응답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속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비참한 죄인들임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말씀과 그의 아들은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말끔히 씻어질 수 있음을 약속합니다.
둘째, 우리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들-그가 만드셨고 유지하고 계시는 이 우주-을 통하여 하나님은 두려울 정도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절대적으로 그 어떤 일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늘에게서, 그의 말씀과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셋째, 이 시편에 보면, 하늘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그의 말씀 및 그의 아들로 말미암은 계시 사이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늘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의 말씀 및 그의 아들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소원은 우리가 그의 구원의 말씀-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을 전하는데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어린아이들의 노랫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가사를 이 시편에 비추어 조금 바꿔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힘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나타나 있네.
하나님의 크심과 힘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심에 나타나 있네.
하나님의 크심과 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게 하심에 나타나 있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의 영광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에서, 이 나라에서, 우리 안에서 하시지 못할 일은 참으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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