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병운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통합)
우리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찬양과 관련하여 동일한 하나님의 목적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43:21).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3-6).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구원 섭리대로 역사적 믿음의 공동체는 저마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노래해 왔다. 음악의 스타일과 노래하는 방식, 그리고 언어와 상황은 달랐지만 공통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은혜를 노래해 왔다는 사실이다 (엡 5:19).
특별히
우리가 교회음악이라고 지칭하는 음악이 예배 안에서 어떠한 가치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중세
가톨릭에서는 교회음악이 예전(liturgy)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되는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음악학교(schola cantorum)를 세워 사제들의 음악교육은
물론 전문적 음악인들을 양성했다.
그러나
개신교에 이르러는 말씀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개혁의 기치(motto)로서의 ‘오직 말씀!’은 비단 루터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오히려 예배의 요소로서의 말씀(설교)의 중요성은 루터보다
칼빈에게서, 칼빈보다 쯔빙글리에게서 보다 극대화 되었다. 그래서 말씀과
관련하여 예배음악에 대한 태도를 보면 칼빈은 시편 찬송(제네바 시편가)만을 단선율로 부르도록 제한적으로 허용했지만, 쯔빙글리는 그 어떤 음악도 예배 안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근대까지만
해도 이러한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배 안에서 음악은 말씀(설교)을 위해 봉사하고 예배를 준비하는 기능과 역할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현저히 나타나는 예배적 현상이 있다. 즉 예배 안에서 찬양의 역할과 중요성이
증대될 뿐 아니라 극대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런 현상은 전통적인 예배 형태를 띠는 교회보다는 현대적인
예배형식을 선호하는 교회들 안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교회들 안에서는 예배는 실제적으로 크게 음악과 말씀
두 부분으로 양분된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음악을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이 증대되고, 찬송의 기능이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예배음악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예배요소의 균형을 깨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신학적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교회음악이 인간중심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이 매우 감정적인 것임을
김대권은 지적하고 있다.
예배의
감격스러움을 주로 감정적인 면에 집중시키고 그런 경험을 추구하는 감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예배를 통한 내면 정서의 움직임은 가능하지만 이 자체가 목적이 되는 감정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오히려 거기서부터 나와 정서적 갱신을 향한 성령 안의 삶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배에서 행해지는 음악이 축제적인 감정이나 분위기를 의도한 것이라면 사실상 그 정당성을 이미
상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음악의 진정한 가치는 예배자로 하여금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레위인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성경은 “여호와를 칭송하며...”(대상 16:4)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칭송(zakar: 기억, 생각,
기념)이란 말과 같이 노래가 심미적 가치를 지닌 봉헌 차원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구속사에
나타난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없이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고 인도해주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감사하는 ‘기념’에 강조를 둔 것이었다.(김대권, 2008:31-32)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말하길 “참된 종교는 인간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것에 있다”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는 현시대의 예배에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예배가 “행복한 삶의 비결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예배의 방향이
인간 중심에서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약 복을 구하는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의 즐거움을
망각하면 이는 인간의 자아중심적인 예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대권,
2008:24-25, 재인용)
예배자들이
예배를 통해 결과물로서 주어지는 기쁨과 은혜와 회복됨을 얻을 수 있지만 이것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는 비단 음악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과 함정에 쉽게 빠져들 만한 취약성이
음악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음악의 방향성이 쉽게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과 교회음악철학이 부재하는 음악은 결국 종국에는 인간을 위한 음악으로 전락하고 만다.(암 6:5)
필자는
제기된 인간중심의 교회음악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그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 첫째, 교회음악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둘째,
교회음악의 올바른 방향성은 무엇인가? 셋째,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응답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넷째,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이며, 예배와 찬양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음악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음악
"Soli
Deo Gloria!"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그의 모든 작품에 표기하였던 문구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신념을 가졌고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졌던 독일 루터교 신자이다.
바흐의
연구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zer)박사는 “바흐는 음악의 끝이다.
아무 것도 그를 이끌 수 없고 모든 것이 단지 그에게로 이끌려 간다”라고 극찬하였다. 또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그에 대해 시냇물(Bach의 뜻)이 아니라 대하(Ocean)라고 칭송했을 만큼
그는 서양음악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인정되지만, 미사(Mass), 수난곡(Passion), 오라토리오(Oratorio) 등 매우 가치 있는 교회음악을 창작한 교회음악가였다. 특히 개신교 음악의 핵심인 코랄(Choral)은 무려 300편에 이르며 현재는 200여 편이 남아있다.
필자가
바흐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교회음악 내지는 보다 좁은 의미의 예배음악의 목적에 관하여 그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음악은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하나는 음악이 담고 있는 가사이며,
다른 하나는 가사를 표현하고 있는 음악이다. 좋은 가사의 교회음악이 반드시 음악적으로
훌륭하다고 말 할 수 없으며, 아름다운 음악의 교회음악작품이 반드시 가사에 있어서 바른 신학과 신앙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바흐의
교회음악의 탁월성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수난곡이나 칸타타를 작곡하면서
기존의 틀과 형식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이러한 특징은 가사와 음악 두 가지 모두에서 발견 된다.
먼저
가사를 살펴보면 기존의 음악들이 성경 그대로의 가사를 쓰던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데 반해 바흐는 문학적이며 또한 신학적으로 볼 때 기독교의 진리를
잘 표현하는 가사이면 가져와 교회음악작품으로 만들었다.
바하의
개인적 신념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그의 칸타타들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칸타타”(cantata)라는 단어는 교회 목사이자 시인이었던 에르트만 노이마이스터(Erdann Neumeister, 1671~1756)가 루터 교회의 음악과 관련해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바하는 수많은 그의 가사에 곡을 붙였다. 이들 칸타타들은 거의 항상 성경 그대로의 가사를 사용했던 쉬츠(heinrich Schütz,1585~1672)의 음악과 같은 초기 루터교 음악으로부터 굉장히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 성경으로부터의 이탈은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바하가 그의 칸타타에 사용한 언어는 너무도 훌륭한 것이어서 기독교의 진리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탁월한
작품들로 남아있다.
바하는
루터교 전통의 합창곡들로부터 친숙한 단어와 음율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비록 회중이 함께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칸타타가 예배라는 인식을 갖도록 하였다. (앤드루 윌슨-딕슨,
2001:95)
뿐만
아니라 바흐는 음악을 다룸에 있어서 미적 표현 보다 신앙적 목표에 더 관심을 두었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통해 이러한 음악적 관점을 보게 된다.
“목표를 향하여 일하고자, 다시 말해서 잘 정돈 된 교회음악을
만들고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음악의 최종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마음의 재창조에 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음악이 아니라 악마의 소음일 뿐이다.”
(앤드루 윌슨-딕슨, 2001:95-96)
이러한
바흐의 음악에 대한 목적의식은 그의 음악의 특징인 ‘상징기법’과 ‘감정기법’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이 정서적 상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음형이론이라고 하는데 즉 음형을 어떤 개념적 내용과 관련짓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음형은 상징성을 띠게 되고 이를 정형화 시키는 것이다.
바흐는
동시대 음악인들과 같이 이 이론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 기법을 그의 교회음악 안에 적절히 사용하였다. 특히 그의 수난곡과 칸타타에서 이러한 특징은 두드러지며 음악은 가사를 돕고 보조하면서 메시지를 음악적으로 듣고 볼 수 있게 만든다.
감정적 내용을 표현하는 감정이론(Affektenlehre)에 대해 바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쁨은 우리 생명의 영이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크고 확장된 음정(interval)으로 가장 잘 표현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슬픔이란 우리 몸의 바로 그 미세한 부분들이 수축하는 것이므로 가장 좁은 음정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당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앤드루 윌슨-딕슨, 2001:97,
재인용)
우리는
교회음악을 다룸에 있어서 모든 음악적인 요소를 통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했던 바흐의 관점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대위적
음악을 통해 보는 하나님 영광과 인간의 응답
바흐의
음악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선율대 선율이 서로 대비되고, 대칭되며 때로는 모방하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흘러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음악을 대위적 음악(대위법,
contrafunctus)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음악의 기원은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으며 그레고리오 성가가 정선율(cantus firmus)이 되고,
이에 대하여 한 성부 혹은 그 이상의 성부를 대선율(contrasoggetto)로
병행시키는 형식으로 이후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점차 바로크시대를 거치면서 18세기 와서는 바흐에 의해 조성적 대위법의 확립이 이루어졌다.
“바하는 푸가형식의 완성과 더불어 모든 가능한 대위법을 극점에까지 이끌어 올렸으며, 대위기법을 최고도로 발휘한 것으로서 바하의 작품은 이 부분의 규범이 되어 현재까지 존속하는 것이다.”(음악대사전, 1989:256)
앤드루
윌슨-딕슨은 바흐의 음악은 “인간관계의 불안정함과 하나님 나라의 안정함과 일치함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듯이, 수평적 다양성(많은 성부들)을 수직적 단일성(잘 구성되어진 화음)으로 만들어 주는데...”라고 간파하고
있다.(앤드루 윌슨-딕슨, 2001:96)
흥미로운
사실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그리스도론의 본질 내지는 기독교적 삶의 모상(模像)을 다성음악(Polyphonie), 특별히 대위적
음악을 통해 통찰력 있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과 그의 영원성을 전심으로 사랑하기를 원하네.
그 사랑은 그것 때문에 지상의 사랑이 상처 받거나 약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의 다른 소리가 대선율(對旋律)로서 울리는 것에
합주하는 일종의 ‘정선율’(Cantus firmus)로서의 사랑인 것이라네. 완전한 독립성을 가지면서, 정선율에 관계되는 대선율의 테마의 하나가 지상의 사랑이지.……정선율이 명료하고 분명할 때, 대선율은 가능한 한 힘 있게 전개될 걸세. 정선율과 대선율은 칼케돈 신조의 용어를 빈다면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인성과 신성이 그런 것처럼 ‘분리할 수 없지만 구별된 것’이라네.
음악에서의 다성음은 이러한 그리스도론의 본질의 음악적 모상이며, 따라서 또한 우리들의
기독교적 생의 모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친근하고 중요한 것이 아닐까?” (디트리히 본회퍼, 1995:171)
본회퍼는
정선율을 그리스도의 신성 혹은 아가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선율은 그리스도의
인성 혹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사랑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독립적이지만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대위적 음악에서 정선율과 대선율은 독립적이면서도 분리될 때는 음악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해 버리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감옥을 방문한 친구에게 이와 같이 권면하고 있다.
“내가 자네에게 바랐던 것은 정선율을 바로, 분명하게 연주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일세. 그때 비로소 충분하고 완전한 소리가 들리고,
대선율은 자기가 항상 지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네.…이 다성음악 속에 있을
때 비로소 그 생은 완전한 것이 되는 동시에, 정선율이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한은 어떠한 화(禍)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걸세.…또
다시 서로 갈라지지 않으면 안 될 날이 와도 그 이별과 결과로 생기는 모든 위험을 무서워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정선율을 신뢰하기 바라네.
”(디트리히 본회퍼, 1995:172)
본회퍼는
정선율을 통해 친구에게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서 분명히 드러낼 것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을 벗고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신뢰하라고 권하고 있다.
앤드루
윌슨-딕슨과 본회퍼의 관점과 통찰을 빌면 대위적 음악은 이글의 주제가 되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 인간들(교회)의 유익함의 관계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좋은 스펙트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교회음악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검증하는 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음악이 수직적 방향과 수평적 방향 중 어디를 향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느 것 하나를 주장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편향된 인간들이 그것의 균형을 깨뜨리면서 치우쳐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정선율로 삼고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대선율로 삼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정신이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는 메시지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본회퍼의 말과 같이 정선율이 확고하고 분명하게 연주되어야 대선율도 견고하게 지지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음악을 통해 우리가 얻고 누리는 유익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교회음악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존귀와
기쁨을 드리는 것이 우선되고 중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성경과
어원을 통해서 보는 하나님의 영광, 예배, 찬양
우리가
사용하는 ‘영광’의 일반적 개념은 부와 소유, 성공과 능력의 빛나는 명예를 뜻하는 단어이나 기독교에서는 그
의미가 훨씬 크다. “영광”과 일치하는 히브리어는 ‘무게’와 ‘덩어리’라는 뜻이며 셈어에 있어서도 무거운
것은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기독교문장대백과사전 15권, 1994: 398)
스투아르트
색 역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히브리인들이 쓰는 ‘카보드’(kavod)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말에는 무거움(heaviness)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들의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무게가 없는 것으로 특징지어 진다. 우리는 그런 경향을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와 기도와 태도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의 무게(weightiness)는 그가 하시는 일과 그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 감지된다.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목격했던 영광은(출24:16) 하나님의 모든 세계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를 통해서 드러난 ‘카보드’(영광)는 그의 구원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인식될 수가 있다. ……1세기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삶의 역경에 직면했을 때 우리들은
영광스러운 주님에 집중해야 한다. 17세기의 위대한 청교도였던 존 오웬(John Owen)은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내가 체험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인성과
영광을 얼마나 묵상했는지에 따라 그의 성장과 영광 속에서 추락을 측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스투아르트 색, 2006:25)
예배(worship)란 말 자체도 예배를 받으시는 분의 가치(worthiness)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곧 그
가치를 알고 인정해야만 그 최상의 가치를 그분에게 돌리며 선포함으로 예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찬양을 뜻하는 여러 가지 히브리어 단어들 속에서도 이와 같은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할렐루야로 잘
알려진 ‘할랄’(halal)은 칭찬하다, 자랑하다, 축하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많이 쓰인 단어는 ‘야다’(yada)로서 이는 어근인 ‘야드’(Yad, 손)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두 손을 들어 경배하다, 두 손을 치켜 올리다. 하나님께 감사하다
등이다. 그래서 종종 ‘감사하다’로도 번역된다. 그리고 ‘바락’(barak)은 축복하다, 무릎 꿇다, 찬양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특별히 김명환은 바락의 정확한 번역이 ‘찬양’ 보다는 ‘노래하여 축복하다’는 의미의 ‘송축’(頌祝)이라고 말하면서 이 단어가 가지는 ‘무릎 꿇음’이라는 뜻이 찬양의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외에도 ‘샤바흐’(shabah)와 ‘룸’(rum)이있는데 ‘샤바흐’는 여호와의 권능과 영광 및 거룩함을 향하여 외경심을 발하는 문맥 속에서 사용되고, ‘룸’은 높다 라는 뜻으로서 찬양의 본질이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라는 것을 나타낸다.(김명환,
1999:21-27)
이와
같이 살펴본 ‘영광’, ‘예배’, ‘찬양’ 등의 단어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치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가치에 맞게 그분의 영광을 예배하고 찬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시편 96편은 이상의 세 단어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halal)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kavod)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kavod)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histahawah)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시96:4-9)
여기서
‘예배하다’라는 동사로 쓰인 Histahawah는 보다 문자적으로 표현하여 ‘엎드려 부복하다’라는
말로서 존경의 표식과 봉사의 개념을 갖는다. 이 시편에 근거하여 생각하면 우리가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으며 그분의 영광과 권능에 합당한 섬김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바흐와
대위적 음악을 통해 살펴 본 영광의 주제와 어원을 통해 얻게 된 영광의 개념을 통합하여 결론을 내리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교회음악의
원리를 얻게 된다. 이점에 있어서 역시 교회음악적 원리를 두 가지 방향성 안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1. 먼저는 수직적 방향에 있어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음악은 하나님 중심(God centered)의 음악이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을 위한(for God) 음악이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에 대한(about God) 음악이어야 한다.
2. 또한 수평적 방향에 있어서도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세속적인 것이 목적이나 중심이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인과 세상을 향한 예언적 선포여야 한다.
하나님 중심의 음악, 예언적 선포로서의 음악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는 “예배의 초점은 인간 경험이나 강연 혹은 종교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구속을 위한 죽으심과 부활에 있다”라고 하였다.(김대권 2008:76)
특히 이러한 예배적 관점은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밝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함을 세 번씩이나 거듭 강조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과 감사는 음악을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가사를 통해 증거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감성에 영향을 주는 음악보다는 가사에 가치를 두어야 하며 이를 음악인들에게 교육해야만 한다. 패트릭 카바노프(Patrick Kavanaugh)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크리스천 화음, 크리스천 리듬, 또는 크리스천
멜로디가 없는 것처럼 크리스천 음악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순수하고 단순한 음악과 결부된 크리스천
가사만이 있을 뿐이다.”
이
시대의 예배음악이 하나님의 영광에 중심을 둔 음악이 되어야 함에 대한 김대권의 논점은 다음에 명료하게 나타난다.
만약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이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면 ‘종교적 유흥(religious
entertainment)'을 유발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유흥, 오락)는 '딴 데로 돌리다(divert)' 혹은 ’마음이나 생각을 빗나가게 하다(distract)'라는 의미로써 삶의 진정한 문제들을 생각에서부터 빗나가게 하거나 떨쳐버리게 하기 위하여 잠시 동안 즐겁게 함을 목적한 말이다.
예배는 하나님만을 즐거워하고 기뻐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비록 예배에서 파생된 즐거움과
기쁨을 인간이 누릴 수 있지만 이것에 중점을 둘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것이 또한 예배이다. 예배 목적의 그
처음과 끝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그 어떤 다른 목적과 기대를 의도하는 것은 예배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유익,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예배란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김대권 2008:178).
또
한 가지 우리가 절대적으로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은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이나, 예배 안에 갇혀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그의 책『위험한 교회』(Dangerous
Memories, Promises, Criticism, Songs)에서 바로 이점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후기 기독교 문화에서 선교적으로 살아가는 유수자들(living missionally)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특히
제 4부 위험한 노래들에서는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유약한 기독교의 노래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빌리
홀리데이(Billy Hollyday)라는 한 여성 음악인을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1930년대 후반, 20세기 미국 흑인의 사회적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폭력에 반대하는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이란 노래를 불렀고 이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에 변화를 준 노래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고 말한다.
남부의 나무들은 이상한 과일을 맺는다네
나뭇잎들 위의 피, 뿌리 위의 피
검은 몸뚱이들이 남부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네
포플러 나무들에 매달린 이상한 열매
(마이클 프로스트, 2009:616-617)
루터의
최초의 찬송(Choral)은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사건을 노래의 형식을 빌어 세상에 전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홍정수는
“그가 직접적으로 찬송가 작업에 뛰어든 것은 예배에 관한 아이디어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격동적 삶에서 만난
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의 찬송가 창작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신구교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 즉 이 사건이란 1523년 7월 그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네덜란드의 두 수사(앤트위프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들이 이단자로 몰려 화형 당한 것이다.
루터는
“우리는 새로운 노래를 부르노라. 우리 주께서 다스리신다”(Ein neues
Lied Wir heben an, das walt Gott unser Herr)를 만들었고 ‘삐라’(Flugblatt)의 형태로 만들어 퍼뜨림으로써 가톨릭의 악행을 세상에 알렸다. 이 노래의 가사를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새로운 노래를 시작하노라
우리 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하나님 찬양과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노래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브뤼셀에서 두 사람의 젊은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놀라운 힘을 밝히셨다.
하나님은 젊은이들에게 풍부한 선물을 부어주셨다.
4. 저들은 어르기도 하고 으르렁대기도 하며 많은 간계를 시도했네.
젊은이들은 장벽처럼 서서 소피스트들을 혐오했네.
옛 원수들이 힘이 빠졌고 그 큰 원수들이
이 젊은이들에 의해 지고 말았네.
원수는 화가 나서 이들을 태우려고 생각했네.
8. 저들은 커다란 불을 붙이고 젊은이들을 데려왔네.
그런 고통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놀랐네.
젊은이들은 하나님 찬양을 노래하며 즐겁게 그 곳으로 갔네.
이 새로운 사실 앞에 소피스트들의 용기는 졸아들었고
그런 모습을 하나님 앞에 보였네.
9. 저들은 자신들이 행한 조롱을 후회하고 그것을 다시 바로 잡으려
했네.
저들은 그 사실을 발설하려 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감추려 했네.
수치가 저들의 마음을 깨물고 그것을 친구들에게 한탄했네.
그러나 심령은 침묵하지 않았네.
아벨의 피가 흘렀으니 가인이 배반했기 때문일세. (홍정수, 2002:277-278)
우리는 마이클 프로스트가 역설하고 있듯이 세상을 향하여, 세상에 대하여도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42:08)
<인용문헌>
김대권, 예배와 음악, 서울: 그리심, 2008.
김명환, 찬양의 성전, 서울: 새찬양후원회,
1999.
홍정수, 교회음악 예배음악 신자들의 찬양,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Bonhoeffer
Dietrich, 옥중서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Frost
Michael, 위험한 교회, 서울: SFC 출판부, 2009.
Sacks
Stuart, 히브리인의 눈으로 본 히브리서, 서울: 크리스천헤럴드, 2006.
Wilson-Dickson
Andrew, 교회 음악사 핸드북,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1.
기독교문장대백과사전
15권, 서울: 성서연구사, 1994.
음악대사전,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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