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교,야곱 프리스트
(성공회)
루터파 교회가 뚜렷한 단체로 대두하게 된 역사는
마르틴 루터(1483-1546)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유럽교회의 역사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주요 인물이다. 원래 법학을 공부하던
루터는 독일 가톨릭 교회에서 수도사가 되었으며, 당시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의 구원에 대한 열렬한 관심과 더 크게는 지옥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수도사로서 루터는
학문을 추구하도록 격려 받았으며, 성경연구에 훌륭한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루터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자기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가르침 받은 내용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루터의 위대한 소망은 당대의 교회가 개혁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으며, 교회가 성경을 반영하여 그 가르침과 관행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정문에 소위 “95개 논제”로 알려진 도전장을 붙였다. 이것은 루터가 교회
지도자들과 토론하여 그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납득시킬 소망으로 그들과 토론하고 싶어했던 일련의 성명서였다. 이 “95개 논제”는 곧 유럽 전역에
널리 복사되어 발간되었다.
많은 문제들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그 중심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면죄부”의 관행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로마교회는 예수님과
모든 성인들의 선행으로 인하여, 교회는 “선행의 보고”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교회는 그것을 ‘면죄부를 구입하는 사람들을 연옥에서 꺼내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연옥은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곳으로서 사람들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그 죄를 씻는 곳이다.) 루터는 교회가 면죄부를
주고, 팔기까지 하는 교회의 관행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연옥 자체에
대한 믿음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루터의 본래 의도는 당대의 교회가 다시 성경과
일치되도록 개혁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가 교회 지도자들과 논쟁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아마도 이 문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신칭의 교리일 것이다.
루터는 성경을 읽으면서,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읽으면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그들이 행한 그 어떤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상의 죽음을 믿음으로써만 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 가르침은 루터의
저작인 “의지의 속박에 관하여”(1525년)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거기에서 그는 의란 오직 은혜에 의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이 커진 후, 마르틴 루터는 1521년 1월 3일에 파문되었다. 그는 독일 보름스에서
열리는 사법 및 정치적 모임인 “보름스 의회”에 출두할 것을 명령 받았다. 루터는 그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기각할 것을 요구 받았다. 루터는 이를 거부하였고 체포되었다. 그는 호의적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게 되었다. 그러나 은신해 있는 중에도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헬라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하였고 그 외 다른 소논문들과 저작들을 저술하였다. 그는 가톨릭의 미사를
일종의 우상숭배라 하여 반대하는 소논문을 썼으며, 사제에게 강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관행을 반대하였고, 수도사의 서약 사상을
반대하였다. 루터가 은신해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교회개혁의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의 초기 가르침과 설교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사상을 따르게 되었고, 1522년에는 그가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그 지역의 당국과 더불어 도시의 교회들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1526년부터 루터는 주로
이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는 일과 중대한 문서들을 저술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는 이 교회들을
위하여 독일어로 된 새로운 예배규칙과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기독교 신앙을 설명해 주는 두 개의 요리문답을 저술하였다. 1534년 루터와 그 외
다른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마쳤다. 이리하여 성경 전체를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하였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단순히 마르틴 루터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교회를 개혁하면서 도시들을 지도한 다른 많은 집단들과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모든
점에서 루터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가 “루터교”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시점부터이다. 루터교란 개신교
교회들 중 주요한 점에 있어서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계속 따르는 한 파를 지칭하는 것이다.
모든 주요한 개신교 단체들은 많은 주요한 종교개혁의
교리들에 대하여 동의하였다. 특히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 궁극적인 권위는
오직 성경이라는 것, 그리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 등이다. 다음 두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루터파 교회는 다른 교회들로부터 분리하게 되었다.
이 주요한 문제들 중 하나는 성만찬 예식에 관한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이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할 때, 비록 그것이 빵과
포도주로 보이고 그런 맛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빵은 정말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포도주는 정말로 그리스도의 피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교리이다.
마르틴 루터는 종종 공체설 교리라 불리는 다른 입장을 가르쳤다. 루터는 빵이 빵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포도주가 포도주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라고 믿었다. 다른 개혁자들은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며, 성만찬은 기념하는 행위라 가르치고 있었다.
다른 하나의 주요한 문제는 비록 덜 신학적이긴
하지만 정치적인 구조와 관련된 교회의 조직 문제였다. 루터는 통치자들과 함께 사역하고 정치적인 권력들과 협력하는 것을 기뻐하였음에 반하여, 다른 유럽 지역들에서는
교회의 조직이 보다 독립적인 양상을 띠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기독교의 지배적인 형태가 된 나라들에서는 교회와 정부 간에 강력한 결속이 이루어졌다.
루터파 교회는 그 후로 독일에서 지배적인 교회가
되었으며,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나라들에서도 지배적인 교회가 되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는, 프레데릭 1세(1523-33) 왕이 루터교 설교자들과
개혁자들에게 저항하였지만, 그의 아들 크리스천
3세는 루터교 신자였다. 스웨덴에서는 두 형제가 선출된 왕 구스타프 바사를 루터교 신앙으로 인도하였는데, 다음 해 스웨덴은
강력한 루터교 국가가 되었다.
1580년까지, 루터파 교회들은 루터교 신앙을 정의하고 그것을 개신교의 다른 신앙들로부터 구별하는 9개의 문서를 규정하였다. 이 9문서는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
그리고 6권의 책을 포함하고 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변증(1531), 루터의 대요리문답(1529), 루터의 어린이 요리문답(1529), 슈말칼트 조항(1537), 협화신조(1577).
7세기 중반에, 루터파 신자들이 이주민으로서 북아메리카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17세기에는 루터교가
기독교적 삶의 실천적인 면과 개인적인 경건 그리고 감정적인 몰입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18세기와 19세기에 루터교 신자들은 세계선교에 더욱 적극적으로 되어 다른 수많은 나라들에 루터교 교회를 세움으로써, 루터교는 이제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다. 또한 18세기에는 루터교 사상이 계몽주의운동에 강한 영향을 받아, 많은 루터교인들이
계시와 성경 위에 있는 이성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점증하는 자유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루터파 교회의 예식과
가르침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고, 때로는 그들이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식들을 아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루터의 시기에, 그의 관심은 오직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면, 루터는 그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입장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예배방식을 철저하게 바꾼 다른 개혁자들과 달랐다. 따라서 많은 점들에
있어서 루터가 그의 교회의 예배의식에 변화를 준 것은 극히 적었고,
많은 형식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닮아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루터교와 다른 개신교
교회들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들은 그들은 성만찬에 대한 이해에 있다.
이것은 루터파 교회의 세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사실이다. 루터파 교회들은
전형적으로 세례가 성만찬과 하나의 성례, 곧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죄사함을 제공하시고 인치시는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법령이라고 가르친다. 루터교인들의 시각에서는,
기회가 있는 한 구원을 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침례교 단체들과는
다르게, 루터교인들은 보통 새로 회심한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들에게도 세례를 준다.
세계에 있는 많은 큰 개신교 단체들처럼, 루터파 교회의 다소
상당한 부분들은 깊이 자유주의화(liberal) 되어 이제는 더 이상 성경을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은 유럽에 있는
루터파 교회들이나 미국에 있는 루터파 교회들 모두에게 있어서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몇몇 나라들 안에서는 서로 다른 루터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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