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ohn Calvin
존 칼빈(1509-1564)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기의
탁월한 프랑스 신학자였으며, 칼빈주의로 알려진 신학체계의 아버지이다. 마르틴 루터와 칼빈은 아마도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주창자들일 것이다. “만일 루터가 개혁의
나팔을 불었다고 한다면, 칼빈은 그 악보를 관현악 곡으로 편곡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종교개혁이 서양문명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6:14-18)
우리는 앞에서, 바라는
것이라고는 세상을 즐겁게 하고 박해를 모면하기 위하여 울타리에 앉아있는 것일 뿐인 사람들을 바울이 정죄하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복음을 왜곡하였기 때문인 바, 오늘도 우리는 이러한 실례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순수한 교리와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없음과 사악한 사람들이 그에 대적하여
격노하는 것을 보아오면서, 저는 이런 사람들이 나쁜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증오를 초래하지 않게 하는 이런저런
방법들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음을 단언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만일
우리가 오늘 어쨌든 좋은 의미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다고 하면, 우리는 백 명 중 겨우 한 명 정도만 교황제도에
잘못된 점들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이 다른 많은 부패행위들을 계속한다 할지라도,
만일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미신들 중 몇 가지만이라도 제거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그들은 존경 받고 크게 신뢰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복음의 순수함을
저버리든지, 그들이 박해를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든지 아무튼 그것이 그들에게는 전부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고
훌륭한 명성을 얻고 싶어하기 때문일까요? 지금 바울 시대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악마는 이런 종류의 싸움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리로 무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대책은 바울이 여기에서 제안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자랑을 거절하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예레미야서에 기록되었고 여기 바울이 확증한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모든 영광이 낮아져야만 합니다(렘9:23, 24). 마찬가지로, 참으로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모든 지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 안에 온갖
좋은 것들을 풍성하게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사라져야만 합니다(사29:14, 고전1:19).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서 기인하고, 우리는 성령의 의해 계몽되고, 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강해짐을 인정하자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더러움과 부정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은혜의 선물에 따라서 우리 안에 의(義)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제 그 수단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시고, 우리의 의(義)이시고, 우리의 지혜이시고, 우리의 힘이심을 아는 것,
다시 말해서, 그 분 안에 완전한 삶과 기쁨과 지복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분과 우리 사이에는 너무 큰 간격이 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추구하는 그 모든 은혜를 얻을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고, 자신을 비우시고,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부족한 모든 것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에, 우리는
바울이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려 하노라”라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왜냐하면, 그 분은 잔인하고 견디기 어려운 죽음을 당하셨고,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받으시며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에 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 분은 우리에게 우리의 지혜와 의,
거룩함, 힘, 그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모든
자랑을 멈추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전혀 근거 없는 교만으로 충만해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정한 자신이라고 상상하는
모든 것들은 바람과 연기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참 모습을 적절하게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위선자들이고 사기꾼들이며, 자신들의 ‘공로’ 때문에 추측으로 잘난 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고찰해야 하고 그 비참함의 정도를 보아야만 마침내 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인도함 받도록 준비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요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죄인이며 무가치하고 헛되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오물 더미에서
뒹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고려하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잠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술 취함과 음란함 같은 것에 자신을 내맡기며, 자신의 사악함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죄악의 쾌락을 계속 추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세상에 취하였고, 악마에게 그 눈이 가리웠고, 자신들에 대하여 설명해야만 하는 그 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악한 일들을
추구하면서도 자신들이 언제나 그대로 남아있을 것으로 믿으며,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경멸하듯이 웃으며 결코
한숨짓거나 공포에 떨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 어떻게 방해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완전히 무능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사탄이 그들의 마음 속에 심어놓은 거짓된 관념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자신들은
충분히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이유입니다.
다른 무수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쌍한 죄인들임을 알면서도 치료 받기를 구하지 아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이 세상이 그들을 움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치료를 구하기 위하여 그들의 눈이나 마음을 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가 말씀 드린 것, 곧 우리
자신의 모든 교만과 추측을 다 제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하기까지 끊임없이 큰 수치를 느껴야 한다는 것에 관하여 더욱 숙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우리의 부패함을 보고 그에 대해 부끄러워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럴 뿐만 아니라 현세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아침과 저녁으로 모든 일을 제쳐두고 자신의 죄를 숙고하고, 또 그 죄가 우리를 찌르고 격려하는 자극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짐승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상에 매이지 아니하고,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함 받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오만함을 때려부수고 짓밟아 굴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특히 십자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본성적으로 그리고 자기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며 또한 그 어떤 위엄을 유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그런 사악한 욕망을 제거하기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그 분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이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계속해서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기를 배웠을 때에 우리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은 우리를 대하여 못 박힐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사람들, 즉 상당한 권위의 자리를 탐하고 중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명예와 승진을 원하는 사람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육욕의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는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잘못된 출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자랑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하게 되었을 때에 세상을 버렸노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란 말로 그는 우리의 육체, 하나님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영생을 생각지도 아니하는 사람들, 탐욕과 야망에 사로잡힘 등 모든 것을 표현하였습니다.
이것들은 각각 사람의 본성적인 본능에 의해 조종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성향을 추종할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사람들을 만져주시거나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실 때, 비록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빠지고
방황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욕망 속에는 큰 변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고찰하면서,
어떤 사람은 한 가지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서로서로 매우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즉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아서 중요한 사람이 되길 원하고, 개인적인 이익이나 쾌락에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들은 이 세상의 낮은 것들에 몰두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로써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 넘기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증하신 것을 알고서는,
우리의 모든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물러나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 것도 쉬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산
자들과 떨어져서 자신의 죄에 대한 의식으로 압도된 사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할 것이며, 세상은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고 또 초대해 주신 그 모든 영적인 부유함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탄의
속임수와 유혹에 비교하면, 우리는 그 가치를 전혀 평가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묵상해 볼 때, 과연 이 세상은 무엇일까요? 우리 중에 아무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잠시 떠다니다가 사라지는
연기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육욕을 불사르며 그렇게 살다가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십니다: “불쌍한 인생이여! 너희는 어린아이만큼도 분별하지 못하는가! 어찌 지푸라기 같은 것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쓰레기와 하찮은 것들에 매달려 분주하며, 어찌 그와 같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가! 내가 너희에게 온전한 지복을 주건만, 너희는 그것을 무시하는도다.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해주시는 그 부유함을
우리가 그토록 차갑게 그리고 더디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 세상의 것들이 우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하도록 만듭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고 계시는 그 귀중한 부유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합쳐봅시다: 즉 우리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이
우리를 대하여 그리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합시다. 지금 이것을 말하는 것은 행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그렇게
행하고자 노력해야만 합니다; 일단 이 교리를 들었으므로 우리는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기독교인으로 인정받고 간주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바울이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따라야 준수해야 합니다; 참으로,
만일 우리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제가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우리는
그렇게 행할 많은 기회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단지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숙고하며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동안 그들이 처한 상태를 숙고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받을만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저주받은 상태로 인하여 파멸 되었다는 것과 이 저주 아래에서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로 단 하루를 사는 것보다 백 번이라도 땅이 그들을 삼켜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을 검증하는 법을 배웁시다. 이 세상을 따라서 자신을 꾸미기 원하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지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거울을 들여다 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가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숙고하게 하는 우리의 결핍과
더러움은 그 거울에 비춰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수치와 부끄러운 행위를 인정하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내면에서 역사하고 계시고 (이미 말씀 드렸듯이) 사탄에 의해 취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치료법을 모색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그치고 우리자신을 신중하게 검증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의 결핍과 비참함을 인정했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갑시다. 십자가로써 모든 오만함과 자존심 그리고
자랑은 내려 놓읍시다. 진정으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면,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를 대하여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함으로써 동일한 내용을 의도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우리가 이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참으로 이 세상을 포기할 수 있고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여 타오르는 불꽃처럼 우리를 태워버리고 우리를 이리저리 방황하게 만드는 그 혐오스러운 우리의 모든
욕망들이 극복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수치스러운 죽음을 우리를 위해 당하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의 우두머리이시며 모든 영광과 위엄과 권한을 가지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세상에서 승리를 얻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그는 누구일까요?
이런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육욕은 극복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우리 마음에 효과적으로 역사하여, 우리의 소원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내면에서 조급하게
흔들리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요점입니다.
또한 이 세상이 우리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그 영적인 부유함과
그 분을 통하여 우리가 누리는 것에 비교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지푸라기요 부패한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부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그토록 열심히 그리고 단호하게 탐내며, 또 그로 인하여 철저히 방해 받는 그 모든
것들은 사탄이 사람들을 잡기 위하여 쳐놓은 그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환상이요 속임수가 아니겠습니까?
예, 이것은 매우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대하여 무가치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배웁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그 분의 자녀와 상속자로 인정하신다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이 없다면 우리는 가장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얽매이지 말고 이 세상을 가볍게 지나쳐야 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곳으로 서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문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고 덧붙입니다. 바울은 당대에 교회를 어지럽히던 사람들은 오직 야망이 그 동기였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고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큰 분쟁의 결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려고 했었음이 분명하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중심에서 통치하시는 것을 보는 것, 우리가 그의 복음의 말씀으로 통치를
받는 것, 그의 능력을 경험하여 아는 것,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큰
자든 작은 자든 우리의 모든 신뢰를 그리스도에게 두는 것 외에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전체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고 그의 말씀에 복종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성전은 믿음과 새 생명 위에 세워집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그 모든 부유하심으로
인하여 그 분을 존경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두고, 그를
찬양하는 것-우리가 같이 만났을 때 그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도록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스타일도 갱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끈기 있게 우리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려는 의향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예수 그리스도 안에’(고후5:17) 있는 것으로 간주되길 원한다면, 우리는
고린도후서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말씀의 요점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그가 가장 능변이라거나,
그가 매우 총명하다거나, 그가 위대한 학자라거나, 혹은 그가 훌륭한 예의를 갖추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다 헛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자신과
이 세상을 버리고, 우리를 값 주고 사셔서 자유케 하시는 분께 우리자신을 드리기를 배우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큰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소유하시고 기뻐하시는 것만이 옳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를 사람들 가운데 붙잡아두는 모든 것을 거절함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할례와 무할례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당면하고 있는 논란과 논쟁이 예식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할례를 예로 들어 예식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과거에 일시적으로 받았던 모든 모형과 그림자들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비웃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옛 것들을
지키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성전의 휘장을 둘로 찢기 위하여, 율법 아래 존재하던 모든 그림자들의 본질이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 분으로
만족해야 하기 때문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할례는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이 구절을 오늘 우리가 보는
것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이 구절로부터 훨씬 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교황제도에는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전적으로 신뢰하는 많은 무의미한
예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황주의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의 공로인 것처럼 자랑하며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 질문하면, 그들은 거룩한 물과 양초들, 향,
오르간과 성가대, 성지순례 등 이것저것들을 자랑합니다. 또한 그들은 제단에서 제단으로, 예배당에서 예배당으로 총총걸음으로 다니는 어리석은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그들은 이때 많은 속죄미사를 드립니다. 줄여서, 교황주의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라고 말하는 것들은 그들이 머리 속에서 날조해 낸 미로와 심연, 미신에 불과합니다. 이제 이런 것들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를 타락시키기 위한
사탄의 속삭임을 듣고 그런 것들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우리도 그런 터무니없는 것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교회도 믿음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나 열심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의 예식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우리가 순수한 양심으로 예배 드리고, 그를 부르며 신뢰하고, 그 분으로부터 오는 온갖 좋은 것들을 알고 있으면 하나님은 만족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차라리 사랑이 완전함의 보증이며 율법의 목적임을 알고 서로서로 올바르고 정직하게 삽시다.
그리고 디도서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우리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서 순결하고
거룩하게 삽시다(딛2:12-1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함과 완전함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이와 반대로
말할 것입니다: “뭐라고!
그러면 우리의 멋진 기도는 어떻게 되는 거야? 다 없애버리는 거야?
하나님을 하늘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낫겠다!” 이것으로 교회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설명을 보았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하나님께 훌륭한 것들을 드린다고
하여 많은 잘못된 것들을 날조해 내고 그런 하찮은 것들에 매여있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 무가치합니다. 누가
이것을 말씀하셨습니까? 바울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검증하고 본질적으로 또한 스스로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제물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우리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비참함에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시는 대로 하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길 기원합니다. 그의 말씀
외에는 다른 지혜의 근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허식이나 세상에 부합하는 세련되고 화려한 겉모습으로 예배 받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거짓 없이 우리의 생각과 애정을 드린다면 하나님은 만족하십니다. 더군다나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서 우쭐대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함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모든 자랑들을 버릴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예배를 받으시는지,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위선자들이 추구하는 무의미한 것들에 속는 위험 가운데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듯이)
교황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자신들을 괴롭힐 때, 하나님은 그것을 순결하게 간주하시고,
자신들을 진노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며,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그를 섬기는 것이라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율법 전체를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기를 바라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 드렸듯이) 그들의 주요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가 완료되었다고 믿어, 하나님으로 인해 많은 압박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관례를 따라 자신들에게 큰 면허를 주고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무엇인가(곧, 단순한 그림자)를 가져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거스르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본문에서 바울의 의도를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규례’를 말함으로써, 바울은 사람들이 그들이 선택한 것을 믿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보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고 거짓에 항복하거나 물러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변개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는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사물의 겉보기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우리보다 뛰어나시다는 사실을 쾌히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와 반대되게 말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느끼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통치하셔야 하고, 그의 법이 우리 삶의 규례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어떻게 통제 없이 사는지를 보십시오. 각 사람은 이런저런 것들을 고안해 내고, 이내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날조한 것을 지키길 기대합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독립된 규례를 가지고 있길 원합니다. 교황교에 있는 모든 사람이
프란시스의 규례나 도미닉의 규례를 따르지 않는 반면에, 자신의 생활규례를 가지고 않은 단 한 명의 바보도
없는 것과 같이, 교황교에는 자신의 규례를 가지지 않은 단 한 명의 노파나 고집쟁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이것이 내가 기도 드리는 방법이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헌신’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정말로 “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은 그것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므로 실제로 하나님을 뒤로 밀쳐놓습니다.
이 얼마나 악마적인 무례함입니까! 그들은
이렇게 저렇게 타협하여 널리 떠벌려 놓고는 이렇게 저렇게 빗나갑니다. 마치 그들은 스스로 굽은 길을 만들고
또 길을 굽게 하면서 하나님이 그의 규례를 왜곡하시고 그들의 견해에 맞추어 주실 정도로 유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괴롭힌다고 하는 이 본문이 말씀하시는 것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는 변함이 없으며 언제나 그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규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복음 안에 계시하시는 완전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 완전함을 우리 생애 동안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좌로나 우로나 다른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목적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하므로, 이 규례에 복종하기로 결단합시다. 그리고 이 규례에 우리 삶을 일치시킵시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은 여기나 저기로 즉각 발걸음을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계시하시고 가르쳐주신
모든 것을 견고하게 붙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평안과 자비를 간구합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리석게도 우리를 비난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비난을 상관치 말고 우리의 방식대로 매진할 것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세상의 어리석은 판단과 그들이 퍼뜨리는 말들에 흔들린다면, 우리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그들은
훌륭한 삶을 살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당황하여 그들의
취향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에 주의합시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우리가
행하는 일들 속에서 비판거리를 발견한다 해도(세상은 하나님과 결코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써 우리에게
복 주셨고, ‘평안’ 가운데 온전한 행복을 주신다면, 우리가 아무리 비참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우리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해도 우리는 만족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모든 덕들이 우리에게 없다 해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약함 가운데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의 비참함 가운데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비록 성령이 하나님의 규례에 복종하는
자들을 복 주신다고 해도, 잘못된 길로 가며 자신의 상상을 법으로 삼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저주하시고,
혐오하시고, 몹시 싫어하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옳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따를 자유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을
둔하게 합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가치가 있든지, 교만과 추측으로
얼마나 취해 있든지, 그들이 언제나 그렇게 중요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든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혐오스러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하고 또한 복음에 담겨져 있는 규례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이 규례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합니까? 그것으로 우리에게 옳게 보이는 것이나 우리 머리에서 날조된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완전함을 얻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한 분만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특히 그 분은 자비로우셔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을 알기에, 그가 우리를 부르시는
곳으로 그를 따라 간다면, 우리의 생명이 그 분으로 인해 복 받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이 이 본문에서 말하는 규례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 세상이 우리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든지 혹은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칭찬한다 해도,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증명하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백성을 인정하시길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서신 전체에서
논쟁하고 있는 그의 대적들은, 마치 오늘날 교황주의자들이 성유와 이런저런 것들을 유지하고 싶어하듯,
진정한 교회의 표지라 여겨지는 모든 예식들을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적들은 교황주의자들보다 훨씬 강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그 모든 것을
거부하며, 하나님은 이런 것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그림자들을 일시적으로 제정하셔서 그것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주셨지만,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본질과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사람의 눈에 화려하게 나타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표지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더욱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우리에게 교회에 대하여 말할 때,
교황과 더불어 그의 세 개의 왕관 그리고 어릿광대 놀이를 위해 변장하는 주교들을 포함시켜야만 합니다. 그들은 존경 받는 짐승들과 같고 그들에 관한 모든 것들은 반짝거립니다; 사제들과 수도사들도
그들 중에 있는데, 그들은 순진한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 눈이 부십니다. 이것이 교황주의자들에 따라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허식적이고 경망스럽고 쓸모
없는 엉터리입니다. 성례(sacraments)는 어떻습니까?
아뇨, 그것들은 이것저것 특별한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한 마디로 그것들은 전적으로 그들의 마음에 맞는 그들의 표지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들과 전문적인 복장을 하고 허세를 떠는 성례 집전자들을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사람이 날조하여 더럽힌 성례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참된 교회의 정의(定議)을 견지합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라, 여기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다” 해도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의 천성적인 관념에 따라 판단하자면, 우리는 육욕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념에 따라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따르려는 경향이 더욱 강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을 굳게 견지해야 합니다.
그의 명령은 변경할 수 없고, 우리의 모든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종할 때만 발견됩니다. 그 전에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외적인 것들에 더
이상 무언가를 덧붙일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 안에 있는 완전함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점에 대하여 바울이 말하는 다른 내용에 주목해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세상은 그 배은망덕함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부유함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폭로합니다.
종종 복음은 충분히 선포되지만, 우리는 모두 복음을 멀리하고 외면합니다,
그리고 마치 구원으로 인도하는 좋은 길에서 떠나기로 작정이나 한 듯이 경솔하게 파멸과 지옥으로 자신을 내던져버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정신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마가 언제나 그 통로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우리를 유혹하고,
괴롭히고, 결단을 못 내리고 방황하게 합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르기까지, 우리는 정처 없는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표를 정하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은혜를 부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그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 정신은 은혜의 보좌가 되어야 하고 은혜가 뿌리내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세상에 매이지 아니하고 우리의 애정과 정신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교리는
절대로 그 반박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 본문에서 그에 대적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전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말할 때, 그는 그 흔적을 모든 군주들의 병기와 왕관과 홀,
그들이 중요성을 부여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배와
존경을 받는 것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군주는 그가 그의 영토를 통치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을 때,
눈이 현혹되어 두려움에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군주들은 그들에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을 때 더욱 자주 이런 복장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이러한 빌려온 수단들에 의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허식과 화려함으로
치장하여 훌륭한 평판을 얻고자 하는 세상사람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사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세속적인 사람들은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사용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 헛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세상이 소중히 여기는 그 모든 것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훨씬 더 귀중하며, 그 본질에 있어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몇 번 사람들에게 매를 맞았을 때, 이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어떤 곳에서는 돌에 맞았고, 또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고후11:23-27). 달리 말하자면, 그는
불쾌한 존재로 간주되어 거절당했습니다. 세상에 따르자면, 우리는 그런
치욕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흔적들이 사람이 누리는 그 어떤 영예와 화려함보다도 더욱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흔적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달려갈
길과 사명을 계속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괴롭게 말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구절에 나타난 바울의 의도는 첫째,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라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자신의 상상을 따르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삐뚤어진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이 불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야생마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주어진 명령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기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수도원들이 바람직합니다.
이처럼 교만하여 신자들의 집단에서 자신을 분리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참으로 악마의
수도사들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경우가 어떻든 간에, 우리는 그들이
왜 사람들을 피하여 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그들을 사로잡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단지 그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살아가게 함으로써 결국은 그들을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합니다.
둘째, 바울은
본문에서 이 ‘규례’를 지켜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셔야 하고, 우리는 그의 형상과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말할 때, 우리가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우리 각자가
그의 명령을 지키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서로 돕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박해에 대하여 이것저것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랑하길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진보를 위한 영적인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도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사탄을 섬기고 있는 것이며 사탄의 포악한 통치 아래에서 종살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복종하듯이 서로가 동일한 마음이 되는 법을 배웁시다. 더군다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이기적이지 아니하고 신실한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소개하면서 자신을 높이길 원하는
이런 거만한 사람들을 경멸하기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그의 흔적들을 인식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아무리 우리가 하찮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의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함없이 이 길을 갑시다. 그리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듯이(갈5:12),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을 쓰러뜨리실 것을 알게 합시다. 만일
사람들이 교회의 일치를 붕괴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촉진되도록 그들의 능력에 따라 봉사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고 흩어지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추측 때문에
그들을 파멸케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이란 큰 대가를 통하여 우리가
소유하게 되었고, 또한 복음을 통하여 매일 우리에게 공급되는 이 부유함을 계속 즐기길 원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이 구절에서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들이 우리를 전율케 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도록 그토록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함을 기도하면서,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엎드립시다. 그때 우리는 참된 회개를 통하여
변화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실 때까지, 우리 육체의 모든 부도덕함과 부패함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의(義)의 옷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하늘의 아버지여!
Online:
http://www.reformedsermonarchives.com/cal1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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